더위도 범치 못하는 양반가의 고즈넉한 뜰

입력 2013년08월09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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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의성 김씨종택

 
 
숨 막히는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달궈진 가마솥처럼 후끈거리는 세상은 사람도, 풍경도 온통 녹여버릴 듯한 기세다. 하지만 이 곳은 딴 세상처럼 고요하고 그윽하다. 바람도 옷깃을 여미며 지날 듯한 고즈넉한 뜰에 만개한 배롱나무 붉은 꽃만이 더없이 선연하다. 발 아래 수북 떨군 붉은 꽃잎은 무채색의 고택 뜰을 화사하게 물들인다.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 귄 있는 여자의 눈썰미 같은 꽃 / 잘디잔 꽃술로 낭랑하게 / 예 예 대답하는 / 그러다 속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 혼자서 짜글짜글 애를 태우다 / 말간 눈물 뚝뚝 떨구는" (이지엽 시인의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중에서).

 안동시내에서 영덕 방면 34번 국도를 따라가다 임하 보조댐을 지나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인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는 이 곳 사람들에게 행정지명인 천전리보다 "내(川)앞(前)마을"로 더 익숙하다. 양반고을로 소문난 안동에서도 손꼽히는 반촌인 내앞마을은 "내앞김씨"라 불리는 의성 김씨가 500여 년간 세거한 마을이다.
 
 풍수에서 "달빛 아래 비단을 빨아 널어 놓은 형국"이라는 이 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의성 김씨종택을 비롯해 귀봉종택, 백하구려, 제산종택 등 의성 김씨 대소가의 전통주택이 모여 있다.


 의성 김씨 종택은 16세기에 불타 없어진 것을 학봉 김성일이 재건했다고 한다. 학봉이 명나라 사행길에 북경에서 그 곳 상류층 주택의 도본을 그려와 지은 집으로,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 독특한 점이 많다.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돼 집의 전체적 배치는 "巳"자형 평면을 이룬 점이라든가, 안채는 다른 "口"자형 평면 주택과 달리 안방을 바깥쪽으로 높이고 동쪽을 향하고 있는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된 점도 그렇다.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집으로, 안채보다 깊숙히 외진 곳에 배치해 방문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종택 앞쪽에 자리한 추파고택은 원래 종택 경내에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분가한 것이다. 1800년대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건립 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옛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고택이다.


 주렁주렁 달린 모과가 담장너머로 고개를 내민 고샅길을 따라가면 의성 김씨 종택과 머리를 맞댄 귀봉종택에 이른다. 의성 김씨 종택이 대종가라면 이 곳은 청계 김진의 손자인 운천 김용을 불천위로 모신 소종가다. 조선 현종 원년에 건립해 고종 25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널찍널찍하게 자리한 건물들과 넓은 사랑마당이 시원하다. ㅁ자형 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이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택 양식을 보여준다.


 이 곳에도 배롱나무 붉은 꽃송이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온갖 꽃들과 나무들이 우거진 사랑마당 화단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유독 눈길을 끈다. 발 아래 수북히 쌓인 붉은 꽃무더기가  세상사에 아랑곳없이 오로지 피고지고만을 되풀이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100일 내내 꽃을 피운다 해서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는 이렇듯 모든 꽃들이 더위에 지쳐 있을 때 더욱 화사하게 피어난다.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껍질을 모두 벗어버린 듯 맨가지를 드러내는 배롱나무의 모습은 선비들이 본받고자 한 청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여름 고택 앞마당에 핀 배롱나무꽃송이가 더욱더 붉디붉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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