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다산길
가로등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자 주위가 일순 노랗게 물든다, 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는 세상을 노랗게 불 밝힌 건 그 때까지 잎을 떨구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 인적 끊긴 능내역에 늦가을 풍경이 어둠과 함께 깃들고 있었다.
능내 3거리에서 마재마을 연꽃호수를 거쳐 실학박물관, 다산유적지까지 이어지는 다산길은 낭만 넘치는 트레킹 코스다. 무드있는 강변길과 호숫길, 숲길을 비롯해 시골마을길, 야트막한 산길이 이어지며 곳곳에 발길 잡는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팔당호변 옛 소내나루터에는 황포돛배가 정박해 있어 조선시대 포구를 연상시키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에선 시대를 앞서간 큰 스승의 업적과 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골마을길로 들어서면 켜켜이 쌓여 있던 오래된 이야기들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중에서도 능내역에는 유난히 많은 사연이 있다.
철도 중앙선의 간이역인 능내역은 1956년 문을 열어 50년 넘는 세월동안 숱한 사연을 싣고 달리다가 지난 2008년 폐역이 됐다. 다양한 사람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대합실은 "고향사진관"이란 이름의 전시실로 바뀌었고, 기차가 달리던 선로에 쉼터가 마련됐다. 역사 벽면에는 지난 세월을 담은 흑백사진들이 찌그러진 주전자와 함께 내걸려 있다. 그 앞으로 쭈루룩 놓여진 나무의자들은 기적소리를 울리며 선로로 들어설 것 같은 기차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의 무게를 내려 놓고 이제는 늦가을 풍경 속으로 저물어가는 능내역을 뒤로 하고 다산유적지로 향한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유적지는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업적과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학자이자 시인, 과학자로 불릴만큼 다재다능했던 다산은 시대를 앞선 선구자였다.
1762년 태어난 다산은 어릴 적부터 경전과 사서, 고문을 부지런히 읽었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그는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와 함께 조선의 개혁을 꿈꿨으나 좌절되고 오랜 유배생활 끝에 1836년 고향인 이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산에게 유배시절은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운 알찬 결실을 거둔 수확기였다. 18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해《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귀중한 저서를 남겼다.
다산은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가"이자 애국·애민의 한 길만을 걸었던 참선비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꾸준히 연구되고 추앙받고 있다.
다산유적지에는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하는 다산문화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다산 묘 등이 있다. 고졸한 멋을 간직한 여유당은 선생의 검소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으로 오르면 다산묘소가 나온다. 다산의 5대조부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고, 다산 또한 이 곳에서 태어나고 세상을 떴다. 부인과 합장한 다산묘역에 서면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강의 흐름이 한 눈에 보인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서한 간찰(簡札)·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특히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다산기념관 옆에 있는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舟橋)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顯隆園)을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도와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야별 저술을 전시했다.
*맛집
다산유적지와 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음식점 황토마당은(031-576-8087) 능내리를 대표하는 음식점이다. 전통을 자랑하는 손맛으로 장어구이, 매운탕, 닭볶음탕을 선보인다. 월문리 머치골로 가면 더 오래된 맛집이 있다. 4대에 걸쳐 90년 전통을 자랑하는 머치골원조매운탕(031-576-3117)이다. 두 음식점 모두 이제는 대형 음식점으로 변모한 탓에 예전의 맛과 그 정성을 모두 기대하기는 다소 어렵다.
*찾아가는 요령
올림픽대로(목동 - 여의도 - 강남 경유) - 미사리 - 팔당대교- 팔당댐 -다산유적지. 강변대로를 이용할 경우 김포공항 - 행주대교 - 강변대로(마포 - 한남동 - 워커힐 경유) - 덕소 -팔당댐 - 다산유적지에 이른다.
이준애(여행칼럼니스트)
▶ "바다 같은" 꿈 어디 두고 쓸쓸히 잠들었나▶ 책 속 지리내용을 보고, 만지고, 체험한다▶ 퇴계가 사랑한 그곳, 깊고 그윽한 만추의 풍경▶ 소박하고 솔직한 서민의 삶에서 춘화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