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군 운악산 봉선사
한 때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로, 지금도 주말이면 많은 나들이객이 드라이브를 즐기는 경기도 포천의 광릉 숲길은 오래도록 가을이 머무는 곳이다. 갑작스런 추위와 눈 소식으로 겨울이 훌쩍 앞당겨진 지금도 광릉 숲길엔 만추의 풍경이 곳곳에 일렁인다. 광릉 국립수목원의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반대 방향에서는 시작되는 곳)에 자리한 운악산 봉선사에도 아직 늦가을의 흔적이 곳곳에 머물고 있다.
봉선사는 광릉에 잠든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그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관련이 깊은 절이다. 절의 역사는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 곳에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다. 여러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예종 때(1469년) 왕의 어머니인 정희대비가 광릉에 잠든 남편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아 "선왕을 받든다"는 뜻의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절은 교종의 수 사찰로 승과고시를 치루고, 스님들이 모여 교학을 익히는 도량으로 사세를 떨쳤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소실과 복구를 거듭해 오늘에 이른다.
처음 봉선사를 찾는 이들은 초입에 세워진 일주문에서부터 놀란다. 여느 절과 달리 일주문 현판에 ‘운악산 봉선사’라 쓴 한글 현판이 내걸려 있어서다. 이런 파격은 사찰 경내로 들어서면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옛날 승과평 터였던 승가원을 바라보며 얕은 경사로를 오르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먼저 길손을 맞이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는 500년 전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숱한 세월을 보내고 맞으며 켜켜이 나이테를 쌓아 온 느티나무와 달리 봉선사 경내에는 천년고찰의 흔적이 별반 느껴지지 않는다. 청풍루를 비롯해 경내에 자리한 대부분 전각들이 근래에 지어진 건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박 눈길을 끄는 전각이 있다. ‘큰법당’이란 한글 현판을 단 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하지만 봉선사에서는 큰법당으로 불린다. 이는 이 절의 주지였던 운허스님(1892~1980)의 뜻에 따른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그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다. 한글 편액을 비롯해 큰법당에 내건 한글 주련도 이에 따른 것이다. 금동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현보살좌상 등 삼존불을 모신 큰법당 안의 화려하고 웅장한 닫집도 눈여겨 볼만하다.
운허스님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와도 인연이 있다. 눈썰미있는 이들은 절 초입의 부도밭에서 벌써 발견했겠지만, 춘원이광수기념비가 운허스님 사리탑이 있는 곳에 함께 서 있다. 운허스님과 춘원은 6촌간으로, 춘원이 친일 변절자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때 이 절의 주지였던 운허는 춘원을 불교세계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지인들이 이 곳에 춘원기념비를 세웠다. 197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썼다. 당시 춘원이 머물렀던 방을 ‘다경향실’이라 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새로 지은 ‘다경향실’이 방적당 아래 자리하고 있다. 방적당은 ‘발걸음을 자유롭게 놓아 준다’(放跡)는 뜻의 당우로, 스님들이 첫 단계 수행을 마치고 심신을 가다듬는 공간이라고 한다.
대부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나 큰법당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1926년 주지 월초(月初) 화상이 처음 지었다. 6·25사변에 타지 않고 남은 유일한 법당이다. 좌우에 산신정과 독성정이, 중앙에는 북두정이 있다.
봉선사에서 놓치지 않고 봐야 할 보물은 범종이다. 조선 예종 1년(1469)에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선왕실에서 주조한 것으로, 현재 사용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6.25로 사찰 전체가 전소될 때 삼성각과 함께 남은 유일한 문화재다.
*찾아가는 요령
구리 톨게이트를 지나 "퇴계원/이동" 방향으로 진입한다. 이동쪽으로 계속 직진하다 보면 "장현"이 나온다. 장현을 지나 검문소(구리 톨게이트 이후 최초로 만나는 상설 검문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광릉/수목원/봉선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검문소에서는 2km 정도의 거리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