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파일럿은 제조사의 고집과 기본이 충실한 차다. 여기서 "기본"의 시점은 2015년이 아니라 2000년 중후반을 말한다. 처음 만들어질 때 기본기를 제대로 다졌고,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는 혼다의 철학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파일럿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2012년이다. 그러나 필자가 혼다를 처음 경험한 것은 1993년 4세대 혼다 어코드 EX가 시작이다. 기본기에 항상 충실하고 날마다 운행해도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게 만든 차, 10년을 운행할 수 있는 브랜드가 혼다였다. 그런데 2015년 시승한 혼다 파일럿도 예외는 아니다. 불편함 없는 혼다의 고집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본차의 성공은 은근 쉽지 않다. 국민 정서도 그렇거니와 한국인의 평균적인 신차 교체 주기와 맞물려 일본차의 장점인 내구성이 좀처럼 인정받기 힘들어서다. 그래서 혼다는 10년 동안 매일 운행해봐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파일럿도 그렇게 설계됐다.
▲디자인 파일럿은 단순하다. 디자인부터 고장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름 디자인 감각을 담아냈다. 형태는 2박스카의 전형이지만 상당히 큰 라디에이터그릴이 돋보여서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커다란 헤드램프와 할로겐 전구는 고집으로 읽힌다. 요즘은 흔해진 LED 등으로 꾸밀 수 있었겠지만 자가정비성과 비용 측면에서 전구 타입을 채용했다.
북미형을 그대로 들여온 까닭에 앞뒤 번호판이 짧은 형태다. 멋스러움이 반감되지만 행여나 북미에서 살다가 차를 가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트렁크는 손잡이 버튼을 누르면 그냥 열리기 위한 준비 단계만으로 작동한다. 전동 트렁크가 장착됐지만 자동으로 여닫히는 기능은 운전석 버튼으로 작동된다. 그리고 트렁크 하부의 닫힘 버튼을 누르면 전동으로 닫을 수 있다.
키(KEY)도 요즘 시대 흔한 스마트 방식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스마트키보다 그냥 홀더에 넣는 키를 좋아하기에 불만은 없다. 도어를 열고 내부로 들어서면 속이 시원하다. 공간이 널찍해서다. 센터 콘솔의 공간은 크기에서 압도당하는데, 대용량 텀블러나 음료를 컵홀더에 놓아도 사이의 간격이 여유롭다. 또한 그 뒤로는 포장된 간식거리도 그냥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눈길을 끈다.
실내 분위기에 꾸밈은 없다. 소박함 그 자체다. 실내 인테리어만 봐도 잡소리가 나지 않을 듯하다. 너무나 소박해서 오염이나 긁힘도 방지할 듯하다. 센터페시아에서 앞 도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라인 등은 사치로 여겨질 정도다. 그냥 사정없이 문을 여닫아도 고장 안나고, 잡소리 또한 없으며, 아이들이 음식물을 흘려도 신경쓰지 않게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2열 승객을 조금이나마 배려하기 위해 온도조절 기능은 타협했다. 2열 시트의 등받이도 조절되고, 3열시트도 장착된다. 아이 두 명에 아이들 친구 두 명까지 4명을 편안하게 뒷좌석에 태우고 간식거리를 가득 싣고 소풍을 갈 여유는 충분히 된다.
▲성능 및 승차감 혼다는 고집이 있다. 남들이 하는 엔진의 다운사이징은 북미형 파일럿에 용납이 안된다. 자동변속기도 6단, 8단, 9단 변속기는 사치다. 그저 5단 변속기로 모든 영역을 커버한다. AWD도 많은 기능이 없다. 그저 가변 토크 제어 장치인 VTM-4 기능이 있을 뿐이다. 차고높이 조절도 안된다. 그냥 편안하게 오랜 기간 사용해도 큰 고장없이 탈 수 있게 만들었다. 적당함 혹은 충분함에서 오는 고집일 듯하다.
시동 걸 때는 비록 열쇠방식이지만 키 온(on)에서 스타트를 원터치로 가능하게 했다. 이 정도만 돼도 버튼시동이나 다름없다. 아이들링 상태는 가솔린 V형 6기통답게 조용하다. 엔진의 진동은 혼다 기술력으로 잘 잡아내고 있다.
3일동안 파일럿을 타고 270㎞를 주행했다.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심과 고속화도로, 약 30㎞구간의 고속도로를 모두 달렸다. V6 3.5
ℓ 엔진의 효율은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심에서
ℓ당 4.3~5.7㎞ 정도를 나타냈고, 고속화도로는 8.4㎞ 부근을 오갔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니 10.4㎞까지 향상됐고, 정속을 유지하면 11㎞까지 도달했다.
도로 노면 상태를 읽고 각종 부싱이 흡수하는 충격흡수 능력은 매우 좋다. 비록 3만2,000㎞ 이상의 누적 주행거리가 있지만 실내외 소리는 정말 혼다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억제돼 있다. 시속 100㎞의 속도는 2,000rpm 약간 아래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체의 노면 소음이 시속 80㎞ 이상에서 조금 나는 편이다.
▲총평 국내 판매 파일럿은 북미 파일럿의 "EX-L" 트림이다. 물론 한국 실정에는 가솔린 고배기량이 대중적이지 않다. 하지만 파일럿은 혼다의 고집과 실용주의가 그대로 묻어나는 차다. 그래서 지금의 파일럿이 주목을 받으려면 중요한 한 가지를 필요로 한다. 바로 가격이다. 4,910만원은 개발된 지 한참 지난 파일럿의 경쟁에 걸림돌로 보인다.
그러나 강점도 존재한다. 바로 내구성이다. 국내 소비자 가운데 신차 구매부터 10년 이상 소유하며 혼다의 내구성을 느낀 사람이 점차 많아지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그럼에도 구형 파일럿임을 감안하면 소비자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는 처방이 필요하다. 흥미를 끌 요소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게 곧 가격이라는 뜻이다.

시승=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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