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통 프리미엄 세단으로 대표되는 재규어가 엔트리급 차종을 선보인 건 X-타입이 처음이다. X-타입은 2001년 글로벌 시장에 소개돼 2009년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포드에 흡수됐던 재규어는 몬데오와 같은 플랫폼을 적용, 가로 배치 엔진과 앞바퀴 굴림을 채택했다. 후륜 구동을 고집하던 재규어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X-타입은 럭셔리 시장에서 BMW 3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와 경쟁했지만 기대와 달리 실적은 부진했다. 대중차를 기반으로 한 프리미엄 세단이라는 점이 출신(?)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년만에 새로 선보인 XE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체 개발한 첫 번째 모듈러 플랫폼과 전용 엔진을 탑재할 정도로 집중했다. 그리고 다른 차종과 마찬가지로 뒷바퀴 굴림을 채택했다. 태생부터 재규어의 프리미엄을 담겠다는 의지에서다. 이를 통해 X-타입의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2.0ℓ 디젤, 2.0ℓ 가솔린, 3.0ℓ 가솔린 엔진이 마련된 XE를 강원도 일대에서 시승했다.
▲스타일
재규어의 디자인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큰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차급과 성격에 맞는 특징을 부여하는 정도다. XE의 외모도 형들인 XF와 XJ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유의 매시타입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동일한 유전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차체 비율이다. 스포츠 세단을 지향해 굉장히 역동적이다. 상위 차급에서 여유있는 비율을 선보였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전반적으로 단단하고 날렵하다는 평가다. 더불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디자인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0.26Cd의 공기저항계수를 달성했다. 재규어 차종 중에서 가장 낮다.
헤드램프는 주간주행등을 포함해 뚜렷한 눈매를 완성했다. 다른 차종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인상이다. 리어램프는 단조로운 사각형태이지만 디테일을 살렸다. 제동등과 방향지시등이 다채롭다. 리어 스포일러는 살짝 엉덩이를 들어올린 듯한 뒤태에 일조했다. 역동성을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내는 좌석 전체를 감싼다. 운전석 도어부터 조수석까지 한 바퀴를 두른다. 반면 시트 포지션은 낮은 편이다. 때문에 다소 시야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카 못지않은 분위기를 냈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시트나 스티어링 휠의 촉감 모두 단단히 감긴다. 실내 소재의 배합도 고급스럽고 어색함이 없다.
엔트리급의 스포츠 세단임에도 곳곳에 수납 공간이 꽤 있다. 도어와 센터콘솔 등에 배려가 엿보인다. 다만 앞좌석을 가로지르는 센터페시아와 콘솔의 너비가 좀 과하다. 변속 레버의 크기도 유난히 크고 필요치 않은 여백이 많다. 이 때문에 실내 활용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내비게이션과 각종 설정을 위한 버튼은 디스플레이 화면 옆에 위치한다. 세계 시장에선 헤드업디스플레이 등을 채택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장착했지만 국내에는 아직 적용하지 않았다. 한국어 지원을 위한 개발 단계에 있으며, 내년 말쯤 도입 예정이다.
▲성능
시승차는 2.0ℓ 디젤과 2.0ℓ 가솔린이 마련됐다. 고성능 차종인 3.0ℓ 가솔린은 아직 국내 들여오지 않았다. 2.0ℓ 인제니움 디젤 엔진은 XE에 최초 적용됐다. 최고 180마력, 최대 43.9㎏·m의 힘을 낸다. 2.0ℓ 터보차저 가솔린 엔진은 최고 200마력, 최대 28.6㎏·m를 뿜어낸다.
새 차는 75% 이상 알루미늄으로 구성된 인텐시브 모노코크를 채택해 가벼우면서도 강성을 높인 게 특징이다. 차체 무게 배분은 50:50으로 설계했다. 서스펜션은 전륜 더블 위시본과 후륜 인테그럴 링크 방식을 조합했다. 인테그럴 링크는 이상적인 수평 및 수직 강성을 제공한다. 재규어 차종 최초로 전자식 파워 스티어링도 도입했다.
주력 차종인 2.0ℓ 디젤은 터보차저를 탑재해 낮은 엔진회전수에서도 강력한 토크를 발휘한다. 첫 발을 떼자마자 차를 끌고가는 넘치는 힘이 느껴진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 같다. 초반부터 성능을 과시하면서도 굉장히 안정적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이 별로 없다. 빗소리에 풍절음이나 노면음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디젤 특유의 엔진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가솔린 엔진의 경우엔 더욱 정숙하고 부드러운 주행감각을 자랑한다. 디젤이 초반에 힘을 뽑아내는 반면 가솔린은 천천히 가속력을 이끌어낸다. 잘 다듬어진 선수가 도로 위를 능수능란하게 달리는 듯하다. 속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없다. 속도계는 시속 280㎞까지 표시돼 있다.
주행모드는 기본, 에코, 다이내믹, 윈터 등 네 가지를 지원한다. 기어 레버 아래 위치한 버튼으로 조작이 가능하다. 다이내믹 모드에선 보다 역동적인 주행을 즐길 수 있다. 서스펜션이 한결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엔진도 달릴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를 보낸다. 오감으로 레이싱을 느낄 수 있다.
대관령을 오르내리는 코스에서 XE는 코너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토크 벡터링 기술로 정확히 안쪽 타이어 구동을 제어한다. 확실히 노면을 움켜쥐는 듯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스포츠 세단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제동도 수준급이다. 빗길에서도 미끄러짐 없이 정확하다. 전후륜에 벤틸레이티드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착했다.
다양한 첨단 기술도 탑재됐다. 우선 프로그레스 컨트롤(ASPC)은 시속 30㎞ 이하에서 눈과 빙판, 젖은 노면 등 접지력 향상이 필요한 노면 상황에서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유연한 주행을 돕는다. 또한 11개의 스피커를 내장한 메르디안 카오디오와 주차보조 시스템 등을 갖췄다.
▲총평
XE는 스포츠 세단으로서 경쟁 차종과 모든 면에서 차이를 뒀다. 재규어 DNA가 묻어나는 디자인과 역동적인 성능, 그러면서도 정숙한 주행감성 등이 특징이다. 재규어의 고집을 모두 반영한 집약체라 할만하다. 다만 다소 협소한 실내 공간은 아쉬운 점이다.
D세그먼트는 판매 볼륨을 책임지는 중요한 시장이다. 이미 BMW 3시리즈와 벤츠 C클래스 등 강력한 경쟁 차종들이 포진하고 있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했던 재규어에게 쉽지 않은 시장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기도 하다. 때문에 XE를 통한 재도전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가격은 2.0ℓ 디젤 프레스티지 4,760만원, R-스포트 5,400만원, 포트폴리오 5,510만원이다. 2.0ℓ 가솔린 프레스티지 4,800만원, 3.0ℓ 가솔린은 6,900만원이다. 경쟁 차종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XE의 독일차 공략 성공 여부가 궁금하다.
오아름 기자 or@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