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馬車이야기⑦]차명(車名)으로 '아칼테케'는 어떨까

입력 2015년10월15일 00시00분 송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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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으로 말을 지배한다는 것은 속도를 활용해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말을 지배한 나라는 늘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국은 흉노족 등 유목 민족을 두려워했고, 그들에게 왕조를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을 겪었다.

 유목민족의 말은 역사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초한지의 주인공 항우의 "오추마", 삼국지에서 여포가 타던 "적토마"가 대표적이다.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해서 "천리마"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말은 "한혈마(汗血馬)"가 아닐까 한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붉은 피땀을 흘린다는 전설의 말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유명한 말이다.

 평소 말을 좋아했던 한(漢) 무제(武帝)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서역 정벌에 나섰다. 무제는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張騫)으로부터 "서역의 대완(페르가나)에 하루 천리를 달리고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리는 명마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페르가나에 명마를 요구했다. 그러나 페르가나는 진상을 거부했고, 결국 한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필두로 원정군을 보내 말을 획득했다. 양마(良馬) 수 십 마리, 중마(中馬) 3,000마리를 얻어 개선한 것이다. 이 양마가 바로 한혈마라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말을 좋아하는 무제는 한혈마를 서극천마(西極天馬)라 일컬으며 노래를 지어 칭송했을 정도다.

 전설의 한혈마는 오늘날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이 원산지인 "아칼테케(Akhal Teke)" 혈통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칼테케는 3,000년 전부터 북이란에서 카스피해 동쪽까지 펼쳐진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에서 사육됐다. 투르크인들은 아라비안이나 페르시안 혈통의 말을 기르고 싶었지만 지역의 고립된 특성으로 아칼테케는 다른 승용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영향을 받지 않았다. 전 세계에 3,500두 정도 남아있는데, 투르크메니스탄 국기에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이고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속도가 빠르고 지구력이 강해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 능력이 우수해 실제로 전속력으로 뛰고 나면 붉은 색의 땀을 흘린다고 한다. 
 
 지난 1935년 55마리의 아칼테케가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슈하바트에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2,580마일(4,152㎞)을 84일 만에 완주하고, 특히 360㎞에 달하는 카라쿰 사막을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3일 만에 횡단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아칼테케의 털은 선명하고 광택이 있으며 흉곽이 얇아 허리가 빈약하지만 균형 잡힌 체형으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한혈마인 아칼테케가 한국에 유입됐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대왕실록에는 1276년 고려 충렬왕 원나라에서 한혈마가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한혈마는 명마 중의 명마로 얼굴이 정말 작고 목이 길고, 가슴은 좁다. 제비를 밟고 달릴 만큼 빠르다 해서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조대왕실록에 묘사된 한혈마와 아칼테케의 외형이 비슷한 대목이다.

 ▲등자의 비밀
 말은 인류 문명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만약 말이 없었다면 문명은 지금과 같이 발달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말과 관련한 인류 100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등자(발걸이)는 인류 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종종 사극이나 서부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등자에 발을 걸고 안장에 오르는 장면을 보곤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말을 타면 당연히 등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등자의 역사는 이외로 짧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등자의 유물은 삼국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인 3세기 후반 발명된 것이다. 유럽에는 8세기가 돼서야 일반에 보급됐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믿기 어렵겠지만 삼국지 영웅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의 기병들은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갈기를 꼭 붙잡고 두 다리와 허벅지로 말 등을 힘껏 조이고 있어야 했다. 이를 놓고 보았을 때 당시 말을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인마일체(人馬一體)의 모습을 보이며 전쟁터를 누비는 유목민족은 농경민족의 보병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육지탄(髀肉之嘆)"이란 사자성어도 이때 나온 것이다. 삼국지 영웅 중 하나인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더부살이하던 중 "전쟁터에 오래 나가지 않았더니 허벅지에 살이 붙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에서 유래했다. 당시 등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 말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즉 등자가 없어 말 등에서는 항상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는데, 허벅지에 살이 붙을 시간이 없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등자는 말을 잘 다루던 유목민족이 처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개량하고 실용화시킨 것은 한(漢)족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안장 한쪽 끝에 가죽 끈 고리를 달아 말 등에 오를 때 보조기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가죽 끈 고리는 말을 타는 중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다보니 말에서 떨어졌을 경우 가죽 끈에 휘감긴 발을 빼지 못해 끌려가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한족은 금속으로 등자를 만들어 안전하고 쉽게 말을 타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등자가 된 것이다. 등자는 유럽에도 전파되었지만 당시 유럽의 야금기술이 떨어져 주철을 대량 생산할 수 없는 까닭에 나무로 등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데 등자에는 과학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다. 바로 무게중심이다. 등자 없이 말을 타는 경우 발을 받칠 곳이 없어 기승자는 내내 허벅지로 말 등을 단단히 조여야 했다. 이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무게중심이 허벅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어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등자에 발을 걸고 탈 경우 발에 힘을 주면 체중을 두 발에 실을 수 있어 무게중심이 발로 내려가고 힘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면 좌우에서 미는 힘에도 훨씬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단지 말을 더 잘 탈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말을 탄 채 칼이나 창을 들고 격렬한 싸움을 해도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말을 귀히 여기고 말을 많이 보유했던 나라는 대부분 강국이었다. 그리고 말이 자동차로 바뀐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자동차 강국으로 꼽힌다. 그렇게 본다면 뒤늦게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한국의 경쟁력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설의 한혈마인 "아칼테케"를 차명(車名)으로 사용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송종훈(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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