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안정세로 접어든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국내외 전문기관에선 올해도 유가가 하락세를 이어가리란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공시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마지막주 전국 평균 휘발유 판매 가격은 ℓ당 1,410.38원. ℓ당 2,000원을 호가하던 지난 3~4년 전과 비교해보면 "차 타고 다닐 만하다"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유류비는 자동차를 운영할 때 드는 가장 큰 비용이다. 연료효율이 자동차 구매 요인 중 상위권을 차지하는 이유도 기름값에 대한 소비자들의 부담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 들어 다운사이징 엔진이나 하이브리드, PHEV 등이 주목받은 이유도 친환경성과 함께 연료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경제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미국 환경보호청(EPA)에 따르면 자동차 업계의 배출가스 저감 성과는 정체기를 겪고 있다. 2014년 이후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사실상 연료효율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EPA가 2014년 북미 시장에 출시된 신차를 조사한 결과 평균 연료효율은 ℓ당 약 10.3㎞,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당 약 228.75g이었다. 이후 3년 여 동안 이 수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자동차 업계는 배출가스 저감에 있어 기술적 한계와 피로감을 숨기지 않는다. 2009년 발표된 유로6 규정은 자동차 업계에서 "기술적 도전"으로 부를 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디젤차의 질소산화물 배출량을 유로5 대비 승용차는 50% 이상, 상용차는 20% 수준까지 낮춰야 했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을 크게 흔들어놓은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 역시 엄격한 환경 규제에 대한 자동차 업계의 부담감을 드러낸 사건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제작사인 독일 폭스바겐마저 현재의 규제 수준을 따르면서 이익을 취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해석이 가능해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규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동차 업계와 정부 모두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EPA는 현재 각 자동차 업체들이 기록한 연료효율이나 배출가스 수치가 1975년 관련 기록을 채집한 이래 가장 낮다는 설명을 내놨다. 또 최근 10년 중 8년 동안 효율과 배출가스가 개선됐다는 점도 언급했다. 각국 정부가 앞다퉈 도입한 엄격한 배출가스 규정과 연료효율 강화 정책이 제조사에 동기를 부여했다는 평가도 들려온다.
실제로 친환경차의 발전은 눈부시다. 1997년 토요타가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를 내놓은 이후 친환경차는 소비자들의 단골 메뉴가 됐고, 글로벌 모터쇼에서도 빠지지 않는 기술 경연의 도구로 활용됐다. 하이브리드 이후 전기차와 PHEV 등 고효율 친환경차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으며, 제조사도 배출가스 저감을 위해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시장 트렌드는 그만큼 "친환경"으로 흘렀다.
하지만 친환경차를 위협하는 요소가 등장했다. 바로 "유가 하락"이다. 앞서 생존을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했던 여론은 최근 유가하락 앞에 천천히 무너지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다. 북미 지역에서 지난해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한 세그먼트는 대형 SUV와 가솔린 픽업 트럭이었다. 떨어진 기름 값이 다시 대형차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고, 모터쇼 등에는 고배기량의 스포츠카와 대형 세단, SUV와 미니밴 등이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가솔린 대형 세단, 가솔린 SUV와 미니밴 등의 판매가 증가하는 추세다. 기름값이 싸진 만큼 이전보다 더 많은 연료를 태우는 부담이 적어졌다는 의미다.
그렇게 보면 소비자에게 친환경은 여전히 "유지비 부담이 적은 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이 적지 않다. 같은 이유로 제조사 또한 규제를 넘기 위한 수단일 뿐 "친환경" 자체에 본질을 두는 것 같지 않다. 기름 값이 떨어지자 소비자와 기업 모두 민낯을 드러내며 비용만 계산하는 모습이다. 환경보다는 편리함과 즐거움, 수익을 갈구하는 욕망을 억제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안효문 기자 yomun@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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