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포르쉐 정통성 챙긴 디자인과 기술
-폭발적인 성능과 깔끔한 균형감 인상적 포르쉐가 태어난 지 72년이 흘렀다. 그 동안 포르쉐는 헤리티지를 지키며 끊임없는 도전으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카이엔부터 파나메라, 마칸, 순수 전기 스포츠카 타이칸에 이르기까지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했다. 무분별하게 가짓수를 늘리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 중심에는 911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 911 덕분에 브랜드의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다. 그 만큼 911은 포르쉐를 대표하는 차종이자 선망의 대상이다. 8세대로 진화한 911(992)은 옛 정통성을 오마주하면서 보다 안정적이고 명확한 성격을 지녔다. 신형을 시승했다.
▲디자인&상품성 911의 디자인은 큰 틀에서 달라지지 않지만 곳곳의 섬세한 변화가 모여 완전히 다른 차를 만든다. 신형도 마찬가지다. 우선 클래식한 감각을 높이기 위한 요소를 볼 수 있다. 보닛에 생긴 깊은 주름과 한층 볼록해진 헤드 램프와 펜더가 대표적이다. 예전 901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LED 매트릭스 기능을 넣은 PDLS 플러스 헤드 램프는 속 구성을 바꿔 명확해졌다. 아래에 여러 줄의 선은 예쁜 속눈썹을 보는 듯하다. 범퍼에 붙은 방향지시등은 한층 가늘어졌고 공기흡입구는 단정하게 다듬었다. 가운데에는 능동형 크루즈컨트롤을 위한 센서도 달았다. 전체적으로 깔끔해진 인상으로 돌아온 앞모양이다.
새 차는 카레라S 기준 길이 4,520㎜이며 너비와 높이는 1,850㎜와 1,300㎜다. 휠베이스는 2,450㎜다. 구형보다 길어지고 높아졌지만 그 차이가 미미하다. 휠베이스는 동일하다. 그 만큼 측면에선 달라진 부분을 찾기가 어렵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팝업식으로 튀어나오는 도어 손잡이, 모양이 달라진 사이드 미러가 그나마 눈에 띈다. 살이 얇은 카레라 클래식 휠은 앞 20인치, 뒤 21인치로 고정이다. 자극이 덜하고 옆라인과의 합이 좋다.
뒷모양은 파격적이다. 아래로 내려간 번호판과 무려 42㎜나 넓어진 너비 때문이다. 신형으로 오면서 휠과 타이어가 커졌고 네바퀴굴림이 아닌 트림에도 동일한 너비를 확보했다. 여기에 세련된 테일 램프는 빵빵한 뒤태를 극대화한다. 가로로 길게 이은 제동등은 공상과학영화 속 우주선이나 로보캅 눈을 보는 것처럼 신선하다.
입체적으로 각을 세운 포르쉐 알파벳의 조화도 뛰어나다. 바로 아래에 붙은 카레라S 필기체는 같지만 911 레터링을 추가해 신형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헤리티지를 지키기 위해 정자체로 새겼는데 크기가 다소 작아 귀엽기도 하다. 엔진룸 냉각을 위한 그릴은 세로형 핀으로 마무리했다. 양쪽 각 9개씩이고 가운데에 붉은 핀 2개가 있다. 코드네임 992를 뜻하는 재치다. 범퍼는 앞과 동일하게 직선을 강조한 단순한 형상이다. 양쪽에 위치한 큼직한 공기통로와 일체형으로 마감한 대구경 배기파이프가 차의 성격을 나타낸다.
실내는 변화폭이 크다. 그 중에서도 수평형 센터페시아와 계기판은 압권이다. 와이드 타입의 모니터는 터치와 함께 화려한 그래픽으로 시선을 끈다. 계기판에서 5개의 원형은 그대로이지만 타코미터만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디지털로 바꿨다.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전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옆으로 넓어진 탓에 양쪽 원형은 스티어링 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가장 오른쪽 원은 기름 바늘과 내비게이션 화면을 담당하는 만큼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센터페시아 중앙에는 가변 배기와 PDCC 등 핵심 버튼을 토글 방식으로 모았다. 아래에는 단조로운 송풍구를 비롯해 공조장치 및 볼륨 버튼을 배치했다. 터치와 물리적 조절 방식을 적절히 섞었다. 개인적으로 전자식 변속레버가 아쉽다. 크기가 작아 장난감처럼 보이고 조작감이 별로다. 스티어링 휠은 디자인이 살짝 바뀌었지만 포르쉐 마니아가 아니면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휠 한쪽에 붙은 운전모드 다이얼도 실용적인 모양새다. 왼쪽에 위치한 시동버튼 키(더미키를 마련해 키를 꽂아 돌리지 않아도 됨)와 선택품목으로 넣은 크로노 패키지 등은 이전과 같다.
공간활용성은 높아졌다. 센터터널에 전용 컵홀더를 마련하고 바로 뒤에 있는 콘솔박스도 USB 단자를 비롯해 제법 쓸만하다. 도어포켓은 고정형으로 바뀌었지만 앞뒤로 두 개의 공간을 뒀고, 동승석 무릎이 닿는 부분에는 그물망 수납함을 추가했다. 햇빛가리개와 글로브 박스도 꽤 큼직하다. 물론 911을 상징하는 2+2 시트 구조는 기본이다. 뒷좌석에 성인이 앉아 장거리를 이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제법 깊은 앞쪽 트렁크는 크기와 모양에서 큰 변화가 없다. 다만 포르쉐 로고에 키를 대면 자동으로 트렁크가 열린다.
▲성능 새 차는 수평대향 6기통 3.0ℓ 트윈터보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444마력, 최대토크 54.1㎏·m를 발휘한다. 새로 개발한 8단 듀얼클러치(PDK) 변속기를 맞물려 정지 상태에서 100㎞/h까지 가속하는 데 3.7초면 충분하다. 안전제한을 건 최고시속은 308㎞다. 효율은 ℓ당 복합 8.2㎞를 실현했다. 구형보다 출력은 24마력, 토크는 3.1㎏·m 높아진 수치다. 가속시간도 4초대에서 3초대로 들어왔다.
일반 모드에서는 스포츠카를 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페달 반응도 여유롭고 차분하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조금 들릴 뿐 파나메라나 카이엔을 타고 있다는 착각도 들 정도다. 여유로운 서스펜션 반응과 넉넉한 댐핑값으로 편안한 승차감도 구현했다. 선택품목인 능동형 크루즈컨트롤을 활성화하면 장거리 크루징도 편하게 다녀올 수 있겠다.
새 차의 본성을 알고 싶으면 운전모드만 바꾸면 된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차가 납작 엎드려 도로에 박힌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스로틀을 열기가 무섭게 차는 총알처럼 튀어나가고 주변 사물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흩어진다. 미친 듯이 널뛰는 엔진회전수 바늘만 살짝 보일 뿐이다. 오버부스트를 사용하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흥분과 매력을 발휘한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정신줄을 붙잡고 온 신경을 운전에 집중해야 한다.
심금을 울리는 주행감각에는 중독성있는 소리의 역할이 크다. 솔직히 지금까지 포르쉐는 BMW M이나 벤츠 AMG, 재규어 SVR처럼 이렇다할 영향력있는 사운드가 부족했다. 운전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신형은 다르다. 기본 소리부터 톤이 올라갔고 날카로워졌다. 여기에 가변 배기 버튼을 누르면 더 굵고 우렁찬 사운드를 연출한다. 가속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요동치는 뇌우 소리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엔진음과 배기음의 교향곡은 실내를 가득 울리며 협주곡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공명음조차 호감 가는 소리로 들린다. 5,000rpm을 넘어가면 절정에 달하면서 소리는 더 커진다. 예전 공랭식 911에서나 들을 법한 거칠고 걸걸한 소리인데 중독성이 상당하다. 옛 포르쉐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환상적인 파워트레인과 조화를 이뤄 세련된 맛도 있다. 고작 기본 라인업인 카레라S가 이 정도다. 신형 GTS나 터보, GT3는 어떤 무지막지한 소리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단수를 추가한 PDK 변속기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생각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다. 다단화했지만 7단과 8단은 항속 기어 성격이 강하다. 이 마저도 크루즈컨트롤을 제외하면 웬만해선 8단까지 올리지도 않는다. 그 만큼 일상 주행에서는 사실상 6단 안에서 모두 해결된다. 찰나에 움직이는 빠른 반응과 한 치의 오차없이 맞물리는 변속감은 여전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은 찾아볼 수 없다.
신형 911의 진가를 경험하기 위해 굽이치는 산길로 향했다. 포르쉐 다이내믹 섀시 컨트롤(PDCC)은 물건이다. 가변 안티롤 바가 코너를 돌 때 차의 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장치다. 주행모드 세팅을 통해 조정 가능하며 별도의 버튼도 마련해 입맛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 PDCC는 차의 움직임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이론적으로는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야 하지만 물리력을 무시한 채 말끔히 코너를 돌아나간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허탈감과 함께 경이로운 마음까지 든다. 불규칙한 와인딩에서 이 정도이니 매끄럽고 예리한 컨트롤이 필요한 서킷에서는 능력치가 더 올라갈 듯하다.
한결같이 정직한 스티어링 휠 반응과 탄탄한 하체 세팅 덕분에 코너를 돌 때 본능적으로 접지력에 기댈 수 있다. 조금의 불안함도 없이 빠른 코너 공략이 가능한 데에는 타이어도 한 몫했다. 앞 245㎜/35/20인치, 뒤 305㎜/30/21인치의 타이어는 바닥에 끈끈하게 들러붙어 섀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노면을 씹어먹으면서 차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잡아내는 일등공신인 셈이다.
48시간 시승 끝무렵에는 요란한 비가 내렸다. 예전이라면 911 운전석에 앉아 하늘을 원망했겠지만 오히려 내리는 비가 반가웠다. 새로 추가한 "웻모드" 덕분이다. 젖은 도로를 자동으로 감지해 운전자에게 빗길 미끄러짐 위험을 경고한다. 시스템이 젖은 도로를 감지하면 포르쉐 스태빌리티 매니지먼트(PSM) 및 포르쉐 트랙션 매니지먼트(PTM) 시스템의 응답을 사전 조정한다. 이와 함께 계기판 오른쪽의 디스플레이에 경고가 표시돼 웻모드 전환을 유도한다.
웻모드가 켜지면 PSM, PTM, 에어로다이내믹, 포르쉐 토크 벡터링(PTV) 플러스 및 구동장치의 응답특성을 조정한다. 90㎞/h부터 가변 리어 스포일러를 퍼포먼스 포지션으로 확장하고 쿨링 에어 플랩을 열면서 가속 페달은 평평해진다. 차체자세제어장치는 끌 수 없고 스포츠모드도 비활성화한다. 엔진 토크는 더욱 부드러워지고 변속기는 자동으로 움직인다.
주행안정성은 월등히 높아진다. 실제 운전하면서 체감이 가능할 정도다. 흔들림이 적고 빠르게 가속해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다. 차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커지고 스포츠카는 빗길에서 위험할 거라는 편견도 사라진다. 참고로 프론트 휠하우징의 음향센서가 흩뿌려지는 물보라를 감지하는 웻모드는 도로 상태와 상관없이 윈드스크린 위의 물방울에만 반응하는 와이퍼 레인센서의 작동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 통해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 도로에 여전히 물이 고인 경우에도 웻모드가 작동한다.
▲총평 신형 911은 정체성을 지키면서 신형다운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과거에 대한 헌신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궈낸 디자인, 기술 조합에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대단한 성능에 접지력이 뛰어난 타이어와 훌륭한 섀시 컨트롤이 만난 신형 카레라S의 몰입감은 GTS나 터보 수준이다. 각 운전모드별 차이가 강해 그 어떤 911보다 일상에서 매일 타고 다니기도 좋다. 빗길과 눈길에서도 911을 탈 수 있게 도와준 웻모드 역시 또 하나의 킬링 포인트다. 새 차는 여전히 최고 수준의 스포츠카다.
판매가격은 카레라S 쿠페 1억6,090만 원, 카레라S 카브리올레 1억7,750만 원, 카레라 4S 쿠페 1억7,030만 원, 카레라 4S 카브리올레 1억8,680만 원이다. 시승차는 카레라S 쿠페에 여러 선택품목을 더해 2억1,030만 원이다.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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