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성능과 한 층 정교해진 감각으로 무장
-차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웨트 모드 인상적
-페라리 고유의 주행 감성과 가치는 변함없어 계획이 틀어졌다. 시승을 떠나는 날 아침부터 날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오후 늦게 폭우가 예상된다는 방송이 나왔다. 페라리 F8 트리뷰토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시승은 안전이 최우선이다. 제아무리 멋진 그림을 만들고, 차의 안전장치와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해도 안전을 무시한 결과라면 의미가 없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을 수 없으니 컨셉트를 바꿔 여유로운 크루징에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F8 트리뷰토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하루였다.
F8 트리뷰토는 페라리의 기존 미드십 V8 제품인 488 GTB의 부분변경 제품이다. 새 차는 지난해 3월 열린 제네바모터쇼에서 신고식을 치르고 그 해 7월 한국땅을 밟았다. 비록 부분변경이지만 차명을 바꿀 만큼 전방위적 변화를 거쳤다. 그 만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보일 것이라고 페라리측은 확신했다. 시동 버튼을 누르니 스티어링 휠과 계기판에 불이 켜지며 화려한 빛을 낸다. 이후 한 번 더 누르면 거친 굉음을 내며 등장을 알린다. 오른쪽 패들시프트를 한 번 당겨 "D" 레인지에 놓고 조심스레 출발했다.
슈퍼카의 특징답게 시야는 좁은 편이다. 극단적으로 작은 사이드 미러는 차선변경 시 숄더 체크가 필수이며 룸미러로 보는 시야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또 차체가 낮아 공사구간이나 불쑥 솟아오른 맨홀뚜껑을 보면 저절로 브레이크 페달에 발이 간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만 주의하면 일상 속에서도 무리없이 운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도심 속 F8 트리뷰토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다음 단수로 변속을 앞둔 엔진회전수에서는 제법 칼칼한 소리를 냈지만 이를 제외하면 주변 차들과 잘 어울려 여유롭게 달린다. 묵직한 가속 페달 덕분에 신경질적으로 튀어나가는 느낌도 덜하다. 스로틀을 적게 열고 정속주행을 하면 일반 세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행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도 마찬가지다. "웅웅"거리는 배기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상황에서도 고속주행에서의 만족도는 상당했다. 노면을 의연하게 걸러내는 서스펜션을 비롯해 하체 세팅도 딱딱함보다는 탄탄한 성격에 가까웠다. 여기에 질좋은 가죽시트까지 더해져 편안한 주행을 가능케 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고 곧바로 스티어링 휠에 붙은 마네티노 스위치를 웻(WET)모드로 돌렸다.
해당 모드로 전환하면 접지력이 떨어지는 노면에서도 차가 자동으로 출력과 트랙션을 컨트롤한다. 차체 바닥에서 기계적으로 얼마만큼 조정하는지 운전자가 실시간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인 움직임이 차분해진다는 건 알 수 있다. 특히 속도를 올릴 때 가속 페달의 양이 많아지고 스티어링 휠의 반응은 침착해진다. 무리하게 급가속하지 않으면 슬립도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강원도가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잦아들었고 인제스피디움에 도착해서는 마른 노면도 만났다. 이 때다 싶어 바로 트랙주행에 나섰다. 주행 모드는 스포츠와 레이스를 번갈아 사용했다. 시트 뒤에 위치한 V8 3.9ℓ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 720마력, 최대 78.5㎏·m의 성능을 발휘한다. 구형보다 50마력 올랐고 0→100㎞/h 가속시간은 2.9초, 0→200㎞/h는 7.8초에 불과하다.
웻 모드에서 몸을 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를 올리고 서킷을 누볐다. 스로틀을 열기가 무섭게 차는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몸이 시트에 바짝 파묻히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자연흡기의 매끄러운 가속과는 다른 강한 펀치력이다. 터보 지연 현상은 찾기 힘들고 레드존을 향해 부드럽고 힘차게 치고오른다. 사실상 7,000rpm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운전자를 인도한다. 강력하면서도 깔끔한 가속성능에 매료돼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7단 더블 클러치는 물건이다. 변속할 때의 순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절도있게 맞물리는 독일식 듀얼 클러치와는 또 다른 감각이다. 특히 다음 단수로 향하기 직전 절정의 순간에서 스티어링 휠에 불이 들어오고 패들시프트를 당기는 맛은 독보적이다. 이와 함께 코너에서는 비현실적인 감각을 선사하며 날카롭게 통과했다. 자세를 잃고 미끄러질 것 같으면서도 차는 아무렇지 않게 빠른 속도로 코너를 통과한다.
넓고 납작한 차체와 조화를 이뤄 안정감이 수준급이다. 여기에는 10% 높아진 공기역학 효율성과 함께 사이드 슬립 앵글 컨트롤 시스템이 한 몫했다. 어느덧 버전 6.1까지 온 시스템은 페라리의 전매특허인 만큼 200% 만족감을 준다. 휠베이스를 비롯해 속도와 방향에 따른 물리력을 무시할 정도로 차를 움켜쥐고 최적의 코너링을 구사한다. 개입과정도 운전 모드에 따라서 차이가 명확하기 때문에 실력을 키우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소리는 변함없이 매혹적이다. 주행영역과 상관없이 어느 위치에서든 독특한 음을 전한다. 저속에서는 ‘둥둥’ 거리는 공명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후 고속으로 갈수록 포효하는 소리가 서킷을 가득 울리며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또 최적의 그립력을 발휘하는 미쉐린 파일럿 슈퍼 스포츠와, 바닥을 무자비하게 찍어내려 차를 세우는 브레이크 시스템도 깊은 감동을 준다.
빗방울이 다시 굵어져 서둘러 패독에 들어왔다. 야속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이제서야 차가 눈에 들어온다. 외관은 한층 날카로워졌다. 헤드 램프와 주변으로 뚫린 깊은 공기구멍 때문이다. 깎아내린 앞범퍼와 거대한 공기흡입구, 양쪽에 마련한 에어덕트, 길게 턱을 내민 스플리터까지 슈퍼카를 표현하는 요소는 빠짐없이 들어있다.
측면은 부드러운 곡선을 사용해 늘씬한 모양이다. 공기역학을 고려한 디자인과 새빨간 페인트가 조화를 이뤄 섹시해 보인다. 후면은 변화가 두드러진다. 동그란 테일 램프는 맥을 같이하지만 범퍼의 형상과 스포일러 등 거의 모든 부분이 바뀌었다. 대구경 배기구와 날카로운 디퓨저 역시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실내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눈에 띈다. 아날로그 바늘의 타코미터 계기판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있다. 차의 진행상황과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스티어링 휠에는 방향지시등과 램프류를 비롯해 서스펜션, 마네티노, 와이퍼 등 차를 다루는 거의 모든 기능이 집약돼 있다. 쉽게 말해 두 손 움켜쥐고 정면만 응시해도 주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동승자를 고려해 공조장치 버튼은 센터페시아 가운데 있고 컵홀더와 수납함도 작게나마 마련했다. 도어 안쪽에는 지갑 하나 넣을 공간이 있고 시트 뒤에는 작은 그물망이 있어 책자나 생수병 정도를 둘 수 있다. 이 밖에 글로브 박스를 제외하면 실내 수납공간은 없다.
개별 주문제작인 만큼 실내 분위기는 오너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시승차는 크림색 가죽으로 덮은 실내가 고급스럽다. 여기에 빨간색 스티치와 페라리 자수로 포인트를 줬고 곳곳에 카본을 섞어 호화스럽다. 대시보드 한 켠에 박힌 F8 트리뷰토 배지도 운전하는 내내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서울로 오는 길에는 천장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낮은 음색의 엔진음을 들으며 여유롭게 주행을 이어나갔다. 룸미러에는 엔진룸 덕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감성을 자극한다. 요철을 지날 때는 계기판에 슬립 경고등이 이따금 들어오지만 충분히 컨트롤 가능한 범위에서 차가 움직여 전혀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700마력이 넘는 고성능차를 빗길에서 이렇게 쉽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F8 트리뷰토는 페라리 슈퍼카 역사에서 부흥을 이끌 대표작이다. 그 만큼 다양해진 소비층을 겨냥해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차로 거듭났다. 일상 도심 속에서는 부담없이 차를 몰 수 있고, 트랙에서는 본성을 드러내며 정체성을 발휘한다.
물론 이 차의 진가를 알려면 주말마다 서킷에 와서 하루 종일 부대껴야 할 듯하다. 그 만큼 차가 가진 색깔이 다양하다. 많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차가 주는 진짜 재미를 경험할 수 있고, 여전히 모두의 드림카로 남을 만한 차가 F8 트리뷰토다.
이 차의 판매가격은 3억5,000만 원대부터 시작한다.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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