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 트럭 충돌 안전 기준 강화가 리베로 소환
-선택은 제조사의 몫
2000년 3월 스타렉스 플랫폼을 이용한 소형 화물트럭이 하나 국내에 출시됐다. 바로 현대자동차 "리베로(Libero)"다. 포터가 그냥 화물이라면 리베로는 승용 느낌의 감각을 살려 소형 화물의 안전과 편의성을 높인 제품이었다. 당시 현대차는 영업용으로 활용되는 포터의 운행 시간이 길다는 점에서 운전자를 보다 배려하는 컨셉트로 리베로를 내놨다.
하지만 현대차의 생각과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보닛이 거의 없는 포터와 달리 리베로는 사고 때 운전자 위험을 낮추기 위한 충격 흡수 공간을 확보하면서 세미 보닛 형태로 설계했는데 이 부분이 문제였다. 세미 보닛 탓에 길이가 5,415㎜로 길어 회전할 때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현재 포터의 길이가 5,155㎜이니 무려 300㎜가 길었던 셈이다. 반면 적재함은 포터보다 작았다. 따라서 리베로는 물건을 많이 싣지도 못하면서 너무 길어 좁은 골목을 드나들기 어려운 차로 인식됐고 결국 2007년에 단종됐다.
리베로가 단종되기 전인 2004년 정부는 전방조종자동차의 충돌 안전성을 강화했다. "전방조종자동차"는 보닛이 없는 원박스형 승합차로 과거 현대차 그레이스, 기아차 프레지오, 쌍용차 이스타나 등을 법률적으로 부르는 용어다. 사람을 주로 태우는 용도지만 보닛이 없어 사고 때 너무 위험하다는 지적에 따른 강화였는데 국내 제조사는 대응을 하기보다 아예 전방조종자동차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새롭게 개발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던 탓이다. 덕분에 세미 보닛 타입으로 충돌안전성을 통과한 스타렉스만 남아 지금까지 승합차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런데 이때 소형 화물차도 전방조종자동차 타입이어서 충돌안전성 강화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화물은 생계 및 영업용이 많아 충돌 시험을 받지 않아도 판매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며 전방조종차의 위험성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됐고 안전성 강화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리고 정부는 여론에 따라 가장 먼저 한국지엠의 다마스와 라보의 안전성 강화를 도입했다. 그러자 한국지엠은 개발비를 투입하느니 차라리 단종하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이를 우려한 소상공인들은 정부에 규제 강화 조치를 유예해 달라고 요구했다. 가장 저렴한 자동차가 사라지면 그만큼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제조사가 기준을 충족했지만 정부는 2017년 또 다시 안전 기준 강화 조치에 나섰고 이때도 소상공인 반대로 5년의 유예가 주어졌고 지난해 마지막 유예 기간을 끝으로 마침내 단종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현대 포터와 기아 봉고가 지배하는 1톤 소형 화물트럭의 충돌 안전성을 강화하겠다고 예고했다. 보닛이 없어 충돌 때 사망 및 상해율이 높은 탓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화물차의 사망률은 2.21%로 승용차의 두 배에 달하고 중상률도 8.22%로 승용차의 5.14%보다 높다(2019 기준). 1톤 소형 트럭 또한 생계형이지만 생계를 이유로 더 이상 위험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결과다.
물론 당장 시행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국토부는 인체 상해 기준은 2024년부터 적용하고 문열림 등의 항목은 2027년부터 적용하기로 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인체 상해 기준을 보닛이 없는 포터로 맞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자동차업계의 판단이다. 결국 세미보닛 타입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단종을 해야 하는 셈이다.
국토부가 관련 기준을 입법예고하자 제조사는 고민에 빠졌다. 준비할 시간은 30개월 정도가 남아 있어 대응책 마련이 가능하지만 고민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이다. 인체 상해율을 낮추려면 현재의 구조로는 사실상 충돌 시험 통과가 쉽지 않아서다. 이 경우 지금 판매하는 포터에 보강재를 덧대는 방식을 떠올리지만 개선 사항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추가 개발비 투입이 불가피한데 포터와 봉고 등의 소형 트럭은 수익이 많은 차종도 아니다. 따라서 수익을 높이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마련이고 이때 리베로의 부활을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과거의 단점이 있지만 리베로를 다시 투입하고 포터를 단종한다면 아예 시장 전체를 바꿀 수 있고 수익성도 높일 수 있어서다. 게다가 안전성 확보라는 명분도 있으니 리베로 부활의 검토 가치는 충분하다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슬쩍 제조사에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제 규제가 강화됐으니 어떤 대안을 찾을 것인지 검토하겠지만 "검토"라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는 것인 만큼 리베로의 부활도 테이블 위에 올릴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소비자들의 반응이라는 얘기도 꺼내 들었다. 기준 강화는 제품 가격 인상을 예고하는 것이고 소상공인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일단 지켜보겠다고 말이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