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640마력의 공통분모, 각기 다른 특성으로 차별화
쟁쟁한 슈퍼카 브랜드를 보유한 이탈리아. 하지만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각 제조사는 과감히 전동화로 돌아서고 있다. 일각에선 수퍼카에 한해 내연기관을 유지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미 전기차 전략으로 돌아선 만큼 되돌리기 어렵다. 람보르기니 역시 폭스바겐그룹의 뉴 오토(New Auto) 전략에 따라 2023년부터 전동화 제품으로만 라인업을 채우게 된다. 사실상 올해를 기점으로 순수 내연기관 시대의 막을 내리는 셈이다. 더 늦기 전, 엔진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람보르기니 본고장인 산타가타 볼로냐에서 V10 엔진을 얹은 우라칸을 만났다.
람보르기니 공장 앞에 나타난 우라칸은 STO, EVO 쿠페, EVO 스파이더 3대다. 먼저 오른 우라칸 STO는 서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차다. 돌려 이야기하면 일반 도로를 서킷처럼 누빌 수 있는 차가 된다. 이름의 STO는 수퍼 트로페오 오몰로가타(Super Trofeo Omologata)의 약어로, 모터스포츠로부터 영감을 얻은 도로 주행용 수퍼 스포츠카란 뜻이다.
외관은 보라색과 노란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뤄 시선을 강탈한다. 공력성능을 위해 곳곳에 날을 세워 마치 잘 생긴 건담을 떠올리게 한다. 후드는 펜더와 경계 없이 통째로 열리는 구조다. 람보르기니는 이 형태를 "코팡고(Cofango)"라 부른다. 코팡고는 보닛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코파노(cofano)"와 펜더의 "파라팡고(parafango)"를 합친 단어다. 코팡고가 등장한 이유는 공력성능 향상, 정비성 개선 등이다. 이밖에 리어 펜더, 스포일러 등 차체 외부 패널은 우라칸과 닮은 구석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쯤 되면 부분변경 이상의 차별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과 알칸타라로 감싼 실내는 다른 수퍼카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다. 디지털 계기판은 고성능답게 속도보다 엔진회전수와 기어 단수를 강조한다. 스티어링 휠은 STO, 트로페오, 피오자의 세 주행모드 버튼이 눈길을 끈다. 주행모드는 각각 도로, 서킷, 빗길에서의 주행 성능을 최적화 할 수 있다.
STO는 최고 640마력, 최대토크 57.7㎏·m를 발휘하는 V10 5.2ℓ 자연흡기 엔진과 7단 듀얼 클러치를 조합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초다. 하지만 패들 시프트 레버를 당기고 변속충격을 느끼며 가속하는 쾌감과 좌석 뒤편에서 울려 퍼지는 엔진음은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우라칸 STO는 구동력을 뒷바퀴에만 전달해 더 짜릿한 운전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회전교차로나 급커브에선 뒷바퀴가 적지 않게 흐르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리한 조향 감각과 고성능에 걸맞은 다양한 주행 제어 시스템 덕분에 바짝 긴장할만한 순간은 없었다. 승차감은 도로 위 레이싱카를 지향하는 차의 성격상 좋은 편은 아니다. 노면의 생김새를 온몸으로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다행히 산타가타 볼로냐의 도로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STO의 단단한 승차감으로 피로를 느낄 때 EVO 쿠페로 갈아탔다. 우라칸 EVO 라인업은 삼각뿔 형태로 갈라진 범퍼의 흡기구가 특징이다. 이 디자인은 6각형을 바탕으로 하는 람보르기니 디자인 정체성에서 시작됐다. 기능면에서도 공력성능 개선 효과를 얻었다. STO에서 EVO 쿠페로 갈아탄 순간 느꼈던 점은 바로 편안함이다. 먼저 실내에 쓰인 여러 소재들이 비로소 레이싱카에서 승용차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계기판 그래픽도 STO에 비해 평범하다. 하체 설정도 확실히 STO보다 부드러워 전혀 다른 차의 성격을 보인다.
하지만 동력성능은 여전히 넘쳐난다. EVO는 STO와 같은 형식의 엔진을 얹어 최고 640마력, 최대 61.2㎏·m를 낸다. STO와 같은 최고출력을 내지만 최대토크는 EVO가 3.5㎏·m 크고, 0→100㎞/h 가속도 0.1초 빠르다. 이런 설정 배경은 네 바퀴를 굴리는 구동 시스템에 있다. 효율적인 구동 배분 덕분에 토크를 키울 여력이 생겼고 순발력도 개선됐다. 주행 안정성을 더했을 뿐 운전을 즐기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세 우라칸 중 마지막이자 가장 오랫동안 시승한 EVO 스파이더는 소프트탑 구조로 인한 무게 증가 탓인지 운전이 의외로 제일 편했다. 개폐식 지붕은 50㎞/h 이하로 달리는 중에서도 17초 만에 여닫을 수 있다. 그러나 32도가 넘는 뙤약볕에도 지붕을 닫지 않았다. 이미 두 쿠페로 제 성능을 확인했으니 컨버터블만의 자유분방한 기분을 내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계기판 바늘의 움직임은 더 현란해졌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이니 다량의 탄소를 내뿜으며 내연기관을 즐기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큰 호흡량을 가진 V10 엔진은 오르막길에서도 거침없는 힘을 발휘했고, 9,000rpm이 넘게 채찍질해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포용력을 보여줬다.
우라칸으로 달린 산타가타 볼로냐의 굽잇길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과 많이 다른 분위기다. 도로는 시원스럽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 가운데에 적당한 경사와 커브 구간으로 이어져 차로 달리기 쾌적하다. 이 나라에 모터스포츠가 발달하고 고성능차가 많은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이 같은 홈그라운드의 특성 덕분인지 우라칸의 엔진음은 여느 시승 때보다 더 우렁차게 울려 퍼지며 귓가를 자극했다. 이 때 느꼈던 엔진의 포효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왜 내연기관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지 잘 알게 해줬다. 그래도 결국은 포기해야 하지만...
산타가타 볼로냐(이탈리아)=구기성 기자 kksstudio@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