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력계와 플랫폼, 섀시 컨트롤 등 전방위 변화
-고성능 전기 SUV의 새로운 기준점 세워
패러다임(paradigm)은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전기차로 패러다임이 넘어오면서 가장 많이 신경 썼던 부분은 효율이었다. 얼마나 더 안정적이고 멀리 나가느냐였다. 주행거리에 대한 압박에 사로잡혀 운전 재미와 감성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는 놓치고 있었다. 물론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튀어나가는 감각은 있지만 전기차의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차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연기관 대비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칸 BEV는 이러한 단점을 말끔히 지우고 전기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주행 퍼포먼스의 완성도는 물론 차와 사람이 교감하면서 차원이 다른 이동의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 여기에는 지능화된 포르쉐 최신 기술과 노하우가 집약돼 있으며 훌륭한 결과값으로 보답한다. 새 전기차 시대를 이끌 마칸 BEV를 지난 가을 독일 라이프치히 포르쉐 센터에서 직접 만났다.
이번에 만난 마칸 BEV는 공식 출시 전 위장막 테스트카를 타고 체험해보는 자리였다. 그만큼 누구보다 빠르게 진보된 포르쉐 전기 SUV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레였고 전문 인스트럭터 손길로 표현될 차의 움직임에도 기대가 컸다. 포르쉐 센터 옆에 마련한 서킷에는 충전을 마친 마칸 BEV가 도열해 있었다. 이후 차에 동승해 본격적인 주행에 나섰다.
웜업 구간에서는 달라진 차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스티어링 휠을 돌리면서 탄탄해진 뼈대와 자세를 확인했고 자연스러운 스로틀 반응을 경험하며 전기차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세팅값을 이뤄낸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차의 본성을 깨웠다. 주행모드를 스포츠로 돌리고 페달을 깊게 밟으니 차는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인스트럭터는 "지금부터 시작" 이라는 짧은 말을 뒤로한 체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서킷 주행을 자주 경험해본 기억을 살려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는 짜릿하고 스릴 있는 주행이다. 고개가 젖혀지고 몸이 시트 안으로 깊게 파 묻히며 피가 강하게 쏠리는 느낌까지 받을 수 있다. 정 가운데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고 광활했던 트랙마저 무척 좁아 보이는 효과를 준다. 더욱 정교한 조작이 필요해 보였는데 마칸 BEV는 아무렇지 않게 각 구간을 민첩하게 통과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좁은 코너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차는 모든 물리력을 무시하고 달린다. 마칸 BEV에는 각 차축에 하나씩 두 개의 모터가 장착된다. 타이칸 구성에서 파생됐으며 보다 효율적인 위치 선점과 SUV에 맞는 세팅으로 바뀌었다. 최대 전력은 450㎾, 최고출력 612마력을 뿜어내며 토크는 100㎏·m를 뛰어넘는다. 더욱이 컴팩트한 차체와 어우려져 체감 가속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빠른 속도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차체에서 깊은 감탄을 받는다. 실제로 무게 배분에 큰 변화를 거쳤다. 앞 차축에 48%, 뒤 차축에 52%로 분산되며 후륜 특유의 밀어주는 느낌이 강하다. 그 결과 계기판 속 숫자는 점점 올라가고 있지만 차는 시종일관 자세를 낮추고 진득하게 노면을 읽고 지나간다. 깔끔한 라인과 빠른 탈출은 식은 죽 먹기다.
여기에 가변적으로 앞뒤에 0:100 또는 100:0으로 힘을 옮길 수도 있다. 즉 운전자 기호에 맞게 차와 화끈한 춤을 출 수 있다는 뜻이다. 뒤를 날리면서 짜릿한 드리프트도 가능하고 반대로 최적의 그립을 확보하면서 운전 실력을 키울 수도 있다. 굽이 치는 연속 코너는 물론 크게 한 바퀴 도는 고속 회전구간까지 트랙 어느 곳에서도 차는 무대 위 주인공을 자처한다. 전기차가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으로 낮은 무게중심과 높은 안정성은 덤이다.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는 2밸브 댐퍼 적용으로 주행 모드에 따라 변화 폭을 키웠다. 이 외에 후륜 조향과 디퍼렌셜 락도 개선을 이뤄 보다 완벽한 움직임에 도움을 주며 토크 백터링 기술도 콤팩트 전기 SUV 성격과 출력에 맞춰 새로 세팅했다. 최대 5도 틀어지는 리어 액슬 스티어링까지 탑재해 속도에 따라 쉽고 편한 조작이 가능하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파워풀한 드라이빙을 마치고 쿨 다운에 들어간다. 배터리 게이지는 생각보다 감소폭이 적었다. 100㎾h 급의 대용량 리튬이온 배터리가 들어간 것도 있지만 출력에 맞춰 최적의 효율을 잡아낸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BMS)의 활약이 컸다. 엄지가 저절로 올라가며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 1회 충전 시 주행가능 거리는 500㎞대에 이른다.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와 숨을 고르고 차를 살펴봤다. 앞은 큰 폭의 변화를 거쳤다. 주간주행등은 타이칸의 모습과 비슷하며 헤드램프는 아래로 내려왔다. 전기차답게 그릴은 보이지 않고 범퍼 아래 부분에 커다란 공기흡입구를 뚫어 놓은 정도로 마무리했다. 프론트 스플리터는 제법 견고하고 날카로웠다. 에어로 다이내믹을 강조하기 위한 흔적으로 보인다.
옆은 팬더를 한껏 부풀려 듬직하다. 루프라인을 완만하게 떨어트린 쿠페형 SUV이며 커다란 휠, 타이어 조합이 돋보인다. 참고로 마칸 BEV는 19인치부터 최대 22인치 휠까지 선택할 수 있다. 뒤는 여느 포르쉐 라인업과 마찬가지로 가로로 길게 이어진 테일램프를 적용했고 깔끔한 트렁크 라인이 인상적이다. 이와 함께 여러 장식을 추가한 뒷 범퍼가 입체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실내는 한 체급 위인 카이엔과 맥을 같이한다. 커브드 풀 디지털 계기판과 와이드 모니터 조합이 기본이고 변속레버는 타이칸과 마찬가지로 상단에 전자식 레버로 위치한다. 크로노 그래프는 기존과 같이 대시보드 중앙에 놓인다. 깔끔해진 센터콘솔도 특징이다. 브릿지 형태로 다양한 수납이 가능하고 공조장치 버튼만 단정하게 마련했다. 이 외에 커진 차체를 바탕으로 부쩍 넓어진 2열과 광활한 트렁크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위장막이 사라지고 취향에 맞게 컬러 조합까지 마친다면 차는 더욱 고급스럽고 세련된 자태를 드러낼 듯 하다.
마칸 BEV는 전기 SUV를 넘어 전기 스포츠카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단순히 강한 힘으로 빠르게 튀어나가는 게 아닌 최적의 균형을 갖춰 우리가 원하는 진짜 스포츠카로 거듭났다. 포르쉐는 일찌감치 시작한 E-모빌리티 기술을 꾸준히 갈고 닦아 양산차에 적용했고 완성도 높은 마칸 BEV를 탄생시켰다. 그만큼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하며 시장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전기차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내연기관의 향수를 잊을 만큼 사고 싶게 만드는 차가 마칸 BEV다.
라이프치히(독일)=김성환 기자 swkim@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