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코리아, 고성능 브랜드 버전 나올까
2차 세계 대전의 판도를 바꾼 상륙 작전으로 유명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그 중에서도 영국과 가까운 프랑스 해안 마을 중의 한 곳이 디에프다. 1922년 이곳에서 태어난 장 르델은 소수 정예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하는 그랑제콜 출신의 엔지니어다. 졸업 후 곧바로 자동차에 흥미를 느껴 미군이 남긴 GMC와 닷지를 개조해 팔았는데 손재주가 뛰어나 작업 속도가 빨랐다. 덕분에 그는 28살 때인 1950년 두 번째 사업으로 프랑스 자동차회사 르노의 디에프 지역 판매 사업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국민차로 불렸던 4CV 판매를 늘리기 위해 장 르델은 완성차 개조에 능숙했던 자신의 능력을 살려 4CV 성능 높이기에 나선다. 그리고 곧바로 자동차 경주에 참여했는데 첫 번째 뛰어넘을 상대는 푸조 203이었다. '디에프-루앙' 경주에서 푸조를 제친 그는 내친 김에 여러 랠리에 참여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때 달렸던 랠리 코스 중에는 알프스를 휘감은 도로가 많았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직접 1954년 스포츠카 브랜드 '알핀(Alpine)'을 설립했다. 이후 1955년 7월, 고성능 스포츠카로 튜닝된 4CV에 알핀 A106이라는 모델명을 붙이고 당시 르노 CEO였던 피에르 드뤼프스에게 3대를 선물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파리모터쇼에 '알핀' 자동차를 처음 선보이며 프랑스 튜닝 업계의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 내에서 알핀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때는 1960년 A108 베를리네타 버전이다. '베를리네타(Berlinetta)'는 '작은 베를린'이라는 의미로 주로 쿠페형 모델에 사용되는 이름이다. 참고로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자동차 이름으로 사용된 배경은 흥미롭다. 17세기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헴름 대제가 장거리용 마차 제작을 네덜란드 출신의 필립 드 치세라는 장교에게 지시했다. 빌헴름은 새로운 마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에 갔는데 현지 부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다. 일부 귀족은 동일한 마차 제작을 주문했고 이때부터 필립 드 치세는 본격적인 장거리용 고급 마차 제작에 몰두했다. 베를린에서 제작된다는 이유로 해당 제품은 '베를린 마차'로 불렀다. 베를린 마차는 2인승으로 개조가 되기도 했는데 마치 2열 좌석을 잘라낸 것처럼 생겼기에 프랑스에선 '자르다'는 의미의 '쿠페(Coupe)'라는 단어가 붙여지기도 했다. 마차 시대가 끝난 이후 대표적인 고급차를 미국에선 세단, 영국은 설룬, 독일은 리무지네로 불렀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선 베를린 또는 베를리네로 불렀던 배경이다.
1962년에 A108은 각종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주문이 폭주했고 장 르델은 아예 전문 공장을 만들어 '알핀'을 프랑스 고성능의 대표 브랜드로 키워 나갔다. 1968년에는 르망 24시에 A210 제품을 출전시켰고 1970년대 들어 수많은 랠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독일 및 이탈리아 스포츠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자 1973년, 고성능 버전이 필요했던 르노는 알핀을 흡수해 모터스포츠 부문을 직접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오일쇼크와 속도 제한 등장으로 스포츠카 산업에 브레이크가 걸렸고 알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1972년 연간 1,421대에 달했던 알핀의 생산량은 1974년 957대로 떨어지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고성능 경쟁에서 밀렸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 셈이다. 이후 추가적인 고성능 모델을 선보이며 재기를 시도했고 1991년 알핀 A610을 제네바모터쇼에 등장시키며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지만 762대 생산에 그치자 르노는 '알핀'이라는 이름을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1999년 르노는 '알핀' 브랜드를 부활시키기 위해 Z11을 개발했다. 당초 2001년 제네바모터쇼에 선보였던 콜레오스 및 탈리스만 컨셉트와 함께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2021년 1월, 알핀과 르노 스포트를 합쳐 새로운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알핀을 르노의 스포츠카 브랜드로 육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르노의 한국 자회사 르노코리아는 알핀 A110을 한국에 도입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제품군에 고성능이 없다는 비판이 일자 이미지 업그레이드 역할을 맡긴다는 방침이다.
그러자 국내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AMG(벤츠), M(BMW), R(아우디) 등의 독일 고성능 대비 브랜드 인지도가 열세에 있는 탓이다. 심지어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보다 아는 사람이 적다. 그럼에도 르노코리아가 알핀 도입에 나선 배경은 스테판 드블레이즈 대표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제품 개발 출신인 만큼 알핀의 제품력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그는 한국 소비자의 높은 눈높이를 고려할 때 알핀은 적절한 제품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알핀의 흥행 여부는 '알핀'을 어떻게 알리느냐가 관건이다. 드블레이즈 대표 말대로 제품력은 나름 인정받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