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히스토리 ⑤] 세상을 바꾸는 車, 프리우스

입력 2024년10월11일 08시45분 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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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타는 렉서스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토요다 에이지 명예회장은 1993년 여름 다시 한번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을 불러모았다. 

 


 

 "자동차에 대한 새로운 비전, 즉 21세기를 대비할 중장기적인 비전을 생각해주십시오."

 

 차세대 대량 생산 승용차 연구 계획, G21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전 지구적인 문제로 떠오른 환경 문제와 에너지위기를 해결할 미래의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보고를 받은 당시 토요다 쇼이치로 회장은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동의와 함께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10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그렇게 백지 상태의 보고서 앞에 마주 앉았다. 

 

 초기 과제 중 하나는 '21세기 자동차' 라는 모호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였다. 기존의 시장 지향적인 접근법을 채택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과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써내려갔다. 소형차지만 휠베이스가 넓어 공간감이 좋아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목표 효율은 20㎞/ℓ로 잡았다. 보고서는 즉각 승인됐고 1994년 2월 1일. 토요타는 G21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21세기 자동차가 갖춰야 할 요소에 대한 치열한 토론 끝에 도출된 결론은 효율을 1.5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 기술'이었다.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와다 아키히로 부사장은 "차세대 자동차는 반드시 하이브리드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G21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대전제에는 모두가 동의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하이브리드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은 충분했지만 그 기술의 완성도 자체는 매우 실험적인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G21 팀이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이자 전환점이었다. 전례 없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했던 이 시점은 G21 프로젝트가 진정한 의미의 미래 자동차 개발로 방향을 틀게 된 순간이었다.

 

 첫 과제는 적절한 엔진을 채택하는 한편 적절한 모터와 배터리를 개발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를 모두 조합해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했고 안정적인 주행을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개발은 처음부터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배터리, 모터, 엔진을 결합한 구조는 양산차에서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전자 장치의 냉각 문제였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막대한 양의 전류를 처리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배터리와 모터는 과열되기 일쑤였다. 

 

 배터리 성능도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이들은 전기차 배터리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니켈-수소 배터리를 채택했지만 만족할만한 성능은 나오지 않았다. 방전이 잦았고 학습 효과로 배터리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만족할만한 성능을 내려니 배터리의 크기가 지나치게 커졌고 이는 차체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치열한 고민 끝에 두 개의 모터가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구동 모터는 감속 시 발전기 역할을 하면서 배터리를 충전하고 두 번째 모터는 엔진의 구동력으로 전기를 생성하는 한편 변속기 제어와 스타터 모터의 역할을 겸했다. 엔진 출력은 자동차의 구동과 발전 역할로 나누고 배터리와 모터 사이에 인버터를 배치했다. 직류 배터리와 교류 모터 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설계였다. 

 


 

 1995년 11월, 모든 부품을 49일간 조립한 끝에 첫 프로토타입이 작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토요타의 첫 하이브리드 프로토타입은 불과 500미터를 주행한 후 멈춰섰다. 연구원들은 차가 움직였다는 데에서 희망을 봤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효율은 기존 소형차보다 떨어졌고 주행성은 형편없었으며, 내구성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시스템을 대량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연구원들을 짓눌렀다. 

 

 엎친 데 덮친 격. 개발 완료 시점을 단축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교토에서 열리는 COP3 회의에 맞춰 프리우스를 선보이고 환경 보호에 대한 선구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하기 전'에 차를 내놓는다는 목표로 1998년 말 까지 개발을 마치기로 했는데 1년을 앞당겨야 한다니. 청천벽력같은 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프로토타입은 양산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료 효율을 두 배로 높여야 하고, 주행성을 개선해야 하며, 내구성을 끌어 올려야 했다. 500미터밖에 달리지 못하는 프로토타입을 개선하기 위해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촉박한 시간에도 이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배터리, 모터, 인버터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고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최적화 하며 목표한 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건 동시 엔지니어링. 설계와 함께 양산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함께 수행한 결과였다. 

 

 그렇게 1997년 10월 세계 최초의 양산형 하이브리드 프리우스가 세상에 등장했다. 자동차 회사로서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출범한 '프로젝트 G21'이 가동된 지 3년 만의 결과물이었다.

 

 최초의 프리우스는 오늘날까지 쓰고 있는 직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갖췄다. 엔진과 두 개의 모터가 결합한 구조로 구동 모터와 발전 모터가 유성기어와 결합해 다양한 주행모드를 구현하는 원리다. 토요타는 이 과정에서 최적의 구조를 찾기 위해 80여 가지의 실험모델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시작부터 성공적이진 못했다. 일본 내수가 주력이었던 만큼 수요가 제한적이었고, 그마저도 비슷한 체급의 토요타 코롤라보다 비쌌다. 더욱이 세계적인 환경을 보더라도 연비 좋은 차가 중요한 시대는 아니었다. 프리우스가 등장했던 시기 국제유가는 배럴당 평균 21.9달러로 최근 시세(77~83달러)의 절반 이하였다.

 

 프리우스가 빛을 보기 시작한건 2세대 부터다. 3박스 세단을 탈피해 5도어 패스트백으로 거듭났다. 공기역학적인 부분을 더 깊이 연구한 흔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향후 경쟁 차종으로 떠오른 혼다 인사이트와 클래리티, 현대차 아이오닉 하이브리드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2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THS2)도 2세대 프리우스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토요타와 렉서스가 지금까지도 널리 쓰고 있는 승압 컨버터와 고전압 전기모터는 이때 처음 등장했다. 다른 차량에도 탑재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높인 설계 구조도 특징이다. 

 


 

 2세대 프리우스는 세계 시장에서도 흥행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으로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며 국제유가가 급등했고, 기후변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며 연비 좋은 친환경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2세대 프리우스는 세계 시장에서만 119만2,000여대가 판매되는 진기록을 썼다. 

 

 프리우스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하이브리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테슬라가 전기차 시대를 열어젖힌 것 처럼 프리우스는 하이브리드를 앞세워 '친환경차'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프리우스의 하이브리드 기술은 오늘날 '토요타=하이브리드'라는 공식을 정립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자동차 제조사도 이루지 못한 전동화 모델 누적 판매 2,000만대를 넘어섰고, 1억4300만톤 이상의 탄소까지 줄였다. 프리우스를 단순히 차 한대의 개발 성과로 치부하기엔 부족한 이유다. 

 

 토요타는 프리우스를 통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이겨냈다. 시간이 촉박했고 기술적 난관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G21 팀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프리우스는 이제 단순한 하이브리드 차량을 넘어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열었던 역사적 혁신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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