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보다 중요한 것, 결국은 대량 생산
1973년 중국 산시성 출생인 지아 유에팅의 본업은 세무 분야다. 산시성 세무서에서 기술 지원 담당으로 일하다 우연한 기회에 비상장 회사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2011년 중국 내에 클라우드 서비스, 소프트웨어 개발, 가전 유통, 영화 제작 등을 거느린 르에코그룹을 설립했다. 이어 2014년 유에팅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패러데이퓨처를 설립하고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때 영입된 재무 및 기술 책임자가 도이치뱅크 출신의 스테판 크라우스와 BMW 출신의 울리히 크란츠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며 유에팅과 갈등이 벌어지자 2017년 둘이 의기 투합해 새로운 전기차 기업 ‘이벨로즈시티’를 설립했다. 이때 중국과 독일의 기업가로부터 투자를 받고 이듬해 오펠 CEO 출신의 칼 토마스 노이만을 영입했다.
사명을 카누(Canoo)로 바꾼 것은 2019년의 일이다. 그리고 첫 번째 전기밴 카누 라이프스타일 비히클을 선보였다. 미니밴, 카고 밴, 픽업 트럭 모두에 적합한 다목적 플랫폼으로 글로벌 주목을 받았다. 디자인 또한 BMW i3와 i8 전기차 작업에 참여했던 한국계 미국인 자동차 디자이너 리차드 김이 합류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컨셉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현대차그룹도 카누의 플랫폼을 눈여겨 봤다. 그 결과 플랫폼 활용 계획은 물론 일부 투자도 단행했다.
하지만 2020년 공동 창업자 중의 한 명인 스테판 크라우스가 회사를 떠나자 기술 책임을 맡았던 울리히가 홀로 회사를 이끌게 됐다. 그리고 본격 생산을 위한 자금 모집에 나섰다. 2021년 3월에는 카누 픽업 트럭을 발표했는데 해당 제품은 한국 투입이 검토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차그룹과 맺었던 전략적 제휴 관계도 종료됐다. 카누가 직접 한국 판매를 추진했고 현대차로선 자신들이 투자한 회사가 국내 경쟁자 리스트에 오르는 게 탐탁지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금 조달과 판매가 여의치 않자 울리히 크란츠가 사임하고 미국 내 자동차 소프트웨어 기업을 일궈낸 토니 아퀼라가 새로운 CEO로 부임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카누 미니밴 생산 계획을 공포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생산 계획을 수차례 발표하지만 매번 번복되는 일이 되풀이됐다. 그러는 사이 운영 자금이 바닥을 드러냈음에도 2024년 룩셈부르크에 본사를 둔 영국의 전기차 스타트업 어라이벌이 파산하자 일부 자산을 무리하게 인수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2025년 1월, 카누는 짓누르는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을 신청했다. 파산 신청 때 카누에 남은 자산은 5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여러 고객사로부터 다목적 플랫폼의 미니밴 및 전기 트럭의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대량 생산 전환에 실패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카누의 실패는 전기차 개발과 생산이 별도 영역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개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량 생산의 영역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의미다. 실제 테슬라 또한 초기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과정이 대량 생산이다. 획기적인 개발이 선행돼도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동시에 그에 따른 생산 시설과 생산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개발과 분리된 별개의 영역이다. 게다가 초기 생산 모델은 품질 이슈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전기차 스타트업 중에선 개발만 담당하려는 곳도 많다. 새로운 개념으로 제품을 개발한 뒤 생산은 전문회사에 맡기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때 걸림돌은 생산물량 보장이다. 생산을 맡긴 스타트업이 위탁 생산된 물량을 모두 판매하지 못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규모를 고려할 때 재고를 오래 가져갈 수도 없다. 이런 점을 간파해 소규모 생산만 해주려는 제조 전문기업도 생겨나는 중이지만 물량 보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생산을 해주기 곤란하다.
간혹 테슬라 같은 스타트업이 한국에서 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듣는다. 이때마다 이유는 대기업 중심, 규제 등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대량 생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 자동차 대기업이 생산을 대신해 줄 리는 만무할 따름이다.
박재용(공학박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