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고급스럽고 여유로움까지 겸비
-강한 출력 넘어 전반적인 만족도 높아
기아 EV9은 이미 기본기가 탄탄한 SUV였다. 특유의 존재감, 전기차의 정숙함, 그리고 실내 공간의 여유까지 갖췄지만 다소 얌전한 출력은 늘 ‘이 정도 차체면 더 강력해도 괜찮을 텐데’라는 생각을 남겼다.
그리고 드디어, EV9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다. GT 배지가 붙은 새 차는 단지 출력 수치를 높인 가지치기 제품이 아니다. 정제된 퍼포먼스를 섬세하게 다듬어 기존 EV9이 숨기고 있던 본능을 세련되게 풀어낸다. 차분하게 달릴 때도, 마음먹고 밟을 때도 EV9 GT는 여유롭고 예리하다.
▲디자인&상품성
외관부터 남다르다. 세로형 패턴이 적용된 전면 액티브 에어플랩, 블랙 슬림 루프랙, 전용 21인치 휠, 그리고 네온 컬러의 브레이크 캘리퍼까지. 과격하지 않지만 분명히 달라진 스탠스는 "이 차, 뭔가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전면부는 EV9 GT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수직으로 뻗은 LED 헤드램프와 기아의 새로운 디지털 타이거 페이스가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GT 전용 액티브 에어플랩은 고성능을 상징하는 세로형 패턴으로 마감돼 있으며 독특한 조명 패턴은 시각적 역동감을 준다. 범퍼 하단은 더욱 입체적이고 넓게 디자인돼 도로 위에서 차체가 더욱 낮고 넓게 보이도록 연출된다.
측면에서는 여전히 각진 캐릭터 라인으로 SUV만의 단단한 느낌을 강조한다. 도어 하단부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직선 라인은 휠 아치 상단까지 연결되며 긴 휠베이스와 짧은 오버행 덕분에 차체가 길고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GT 전용 21인치 휠은 기하학적인 패턴과 다이내믹한 컷팅으로 시각적 무게감을 높였고, 그 안쪽에 자리잡은 거대한 라임색 캘리퍼는 이 차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후면부는 독창적인 수직형 리어램프와 디퓨저가 중심을 이룬다. EV9 특유의 'ㄱ'자 형태 리어램프는 GT에서 한층 입체감 있게 마감되었으며 점등 시 그래픽 효과로 시선을 끈다. 리어 디퓨저는 차체 하단을 감싸듯 넓게 퍼져 고속 주행 시 공기 흐름을 정리해주며 시각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범퍼 주변 디테일은 복잡하지 않지만 면 처리의 조화와 조형의 절제 덕분에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실내 역시 GT만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알칸타라 스포츠 시트와 스웨이드 마감재는 고급감과 스포티함을 동시에 품는다. GT 브랜드의 상징색인 라임색이 곳곳에 자리잡았고 헤드레스트에 큼지막하게 양각 처리한 GT 로고도 멋을 더한다. 언뜻 불편해보이지만 앉았을 때의 착좌감은 기존 EV9에서 전달했던 것 만큼이나 좋다.
스티어링 휠 디자인이 다른 점도 눈길을 끈다. 9시 방향 하단에 자리한 GT 모드 버튼은 이 차가 단순한 패밀리 SUV가 아니라는걸 은연중에 드러낸다. 대시보드를 따라 자리잡은 스웨이드 소재의 마감재와 GT 음각 레터링 등은 고급스러움을 더하는 요인이다.
2열과 3열 시트 디자인도 달라졌다. 형상 자체는 큰 변화가 없지만 곳곳에 라임색 파이핑과 스티치를 더해 동승자들도 고성능차에 앉았다는 느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2열 릴렉션 기능, 3열 전동 폴딩 및 리클라이닝 기능도 그대로여서 모두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겠다.
편의 기능도 더 풍부해졌다. 기아 최초로 적용된 100W 고속 충전 C타입 포트를 비롯해 디지털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적용해 악천후에서의 시야감도 높였다. 모든 회생제동 단계에서 작동하는 아이 페달 3.0, 빌트인캠 2 등은 EV9 GT가 단순히 빠르기만 한 전기차가 아니라는걸 잘 보여준다.
▲성능
EV9 GT의 전륜과 후륜에 각각 타뱆한 듀얼 모터 시스템은 최고출력 509마력 최대토크 75.5㎏∙m을 낸다. 배터리 용량은 99.8㎾h로 1회 충전 시 최장 408㎞를 갈 수 있다. 정지 상태에서 100㎞/h까지 주파 소요 시간은 단 4.5초. 숫자만으로도 제법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고성능차라고 해서 불편한 차는 아니다. 도로 상황을 미리 읽어 감쇠력을 조절하는 프리뷰 서스펜션은과 정숙한 실내 환경 덕분에 일상에서는 오히려 기존 EV9보다도 부드러운 승차감을 제공한다. 저속에서 가볍고 여유로운 스티어링 세팅이 부담을 덜어주며 방지턱이나 요철을 지날 때도 뒷바퀴가 과하게 튀지 않고 차분하게 반응한다. 무게 중심이 낮고 하체가 탄탄하게 받쳐주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형 SUV보다도 훨씬 안정감 있는 승차감이다.
본격적으로 달려볼 땐 이야기가 다르다. 속도를 높이거나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바꿀 때, 이 거대한 차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유연하게 반응한다. 전자식 차동 제한 장치(e-LSD)는 코너링 중 좌우 바퀴의 구동력을 정밀하게 제어한다. 4피스톤 캘리퍼와 대용량 브레이크 디스크, 0.6G 수준의 회생제동 시스템까지 갖춘 덕에 ‘가는 힘’뿐 아니라 ‘멈추는 힘’도 강력하다. 무게감 있는 차체를 지렛대 삼아 묵직하고 안정적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은 GT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스티어링 휠에 위치한 GT 모드 버튼을 누르는 순간 EV9 GT는 모든 감각을 깨운다. 반응은 즉각적이며 스로틀 맵, 서스펜션, 스티어링 세팅이 일제히 공격적으로 변한다. 늘상 안정적인 움직임만 보이던 차체는 뒤가 살짝 흐르는듯한 움직임까지 제공하며 말도 안되는 운전 재미를 제공한다.
여기에 가상 변속 시스템(VGS)과 연동된 e-ASD 사운드까지 더하면 재미는 배가 된다. 가상의 엔진 회전수에 따라 패들 시프트를 당겨주면 변속 충격까지 구현해낸다. 변속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속 페달만 유지하고 있으면 마치 내연기관 레이스카를 타는듯 '퓨얼 컷'이 걸리는 느낌까지 구현해놨다. 전기차에서 '손 맛'을 느낄 수 있다니. 여러모로 헛웃음이 나왔던 순간이다. 그저 빠른 SUV가 아닌, 운전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전기차다.
▲총평
기존 EV9은 ‘기아의 플래그십 SUV’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어딘가 여운을 남긴 채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주행 감각은 탄탄했고, 고속 안정성도 훌륭했지만 출력은 다소 얌전했다. 그리고 EV9 GT는 마침내 이 거대한 SUV에 적합한 '꼭 맞는 옷'을 입고 있었다.
EV9 GT는 고성능 전기차로서의 본질을 충실히 수행하는 동시에 기존 EV9이 지니고 있던 실용성, 정숙성, 고급감이라는 미덕을 그대로 품고 있다. 스포츠카처럼 빠르면서도 패밀리카처럼 여유롭고, 의전차처럼 고급스럽다. 다양한 성격이 조화를 이루는 이 차는 단지 EV9의 고출력 버전 그 이상이었다.
EV9 GT의 가격은 8,849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