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팩 스스로 발화 감지, 진압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며 시장에 대응할 겁니다.” 지난해 배터리 화재로 나라 전체가 들썩였을 때 EV 업계 관계자가 전한 메시지다. 그리고 수 개월이 흐른 지금, 결과가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핵심은 어떻게 화재를 초기에 진압해 차량 손실을 낮추느냐에 맞추어졌다. 이를 위해 주목한 것은 각 단계별 역할이다. 먼저 화재가 발생하면 재빨리 감지하고 곧바로 배터리 팩 내부에서 발화를 억제하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해당 방식을 선택한 곳은 현대모비스다.
현대모비스는 배터리셀 발화 시 소화 약제를 자동 분사해 화재가 즉시 진압되는 형태를 고안했다. 당연히 인접 셀로 열이 전이되는 것을 막아 열 폭주를 사전에 차단한다. 유럽과 중국, 인도 등 주요 국가들이 배터리셀 최초 발화 후 열폭주를 최소 5분간 지연시키도록 의무화하는 점에 착안했다.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이 이상을 감지하면 약제 분사 위치를 설정하고 소화장치에 작동을 명령한다. 배터리시스템 내부에 탑재된 소화 약제는 일반 가정용 소화기의 5배에 달하는 양이다. 냉각과 절연성, 침투성이 뛰어난 물질로 환경과 인체에 무해하다고 강조한다.
화재 시 외부에서 물을 배터리팩 내부로 주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있다. 르노가 올해 한국에 내놓을 세닉 EV에는 소화 호스 연결이 가능한 물 주입구가 있다. 배터리에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차와 연결 가능한 호스를 통해 배터리 팩 전체에 물을 채운다. 열폭주가 억제되며 화재 진압 시간을 내연기관 수준으로 단축시킨다. 게다가 팩 내부에 직접 물을 주입하는 방식이어서 소화에 사용하는 물도 크게 줄일 수 있다.
화재 발생 후 진압 방식을 고민하는 곳이 부품사 및 완성차 기업이라면 셀 제조사는 원천적인 화재 예방에 치중한다. 대표적인 것이 산화물계 고체 전해질이다. 스타트업 에이에스이티(ASET)가 상용화에 성공한 복합계 고체 전해질은 모든 실험을 마치고, 대량 생산을 준비 중이다. 전해질을 바꾸면 셀 자체의 화재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다. 셀과 팩 차원의 화재 억제 대책이 모두 적용되면 EV는 화재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물론 셀과 팩의 근원적인 화재 방지 대책이 일상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 방안은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을 이용 단계에서 최대한 억제하는 것뿐이다. 셀 이상이 감지되면 즉각 운전자에게 통보되고 동시에 소방과 연결해 초기 진압에 나선다. 정부가 모든 전기차의 배터리 정보를 충전기로 확보하려는 배경이다. 배터리 충전 과정에서 이상을 감지해 사전 조치하겠다는 의도다.
그래서 EV 화재 대책은 크게 세 가지로 모아진다. 이용 단계에서 과충전 등을 방지하는 것, ASET처럼 셀 내부의 전해질 소재를 바꿔 원천적으로 화재 발생 가능성을 아예 낮추는 것, 그리고 팩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최소 시간에 진압하는 것 등이다. 한 마디로 1차, 2차, 3차 예방 대책이 동시에 추진되는 중이다.
이처럼 화재 진압에 주목하는 이유는 EV 전환 속도 때문이다. 전기차 업계는 EV로 바뀌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질 것으로 내다본다. 최근 몇 년 가파르게 증가했던 EV 시장을 ‘과도기’로 평가하고 지금의 증가 수준을 정상으로 본다면 이제부터 확산 속도가 서서히 빨라질 것으로 확신한다. 다양한 제품을 쏟아내는 만큼 소비자 관심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다. 그래서 화재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그에 따라 화재 진압 기술도 빠르게 진화하는 중이다. 느리지만 EV 시대로 걸어가는 보폭의 확대는 결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재용(공학박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