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6시간의 영화, WEC 후지 내구레이스를 가다

입력 2025년10월13일 08시30분 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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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보다 긴 호흡..전략적 선택 중요하게 작용해
 -푸조의 집념, 알핀의 도박, 포르쉐의 불꽃..최고의 명장면

 

 후지 스피드웨이의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다. 일교차로 하얀 수증기가 피어 올랐고, 얼굴을 가린 후지산 아래 아직은 약간의 습기가 남아있는 노면도 긴장감을 더했다. 

 


 

 관중석에는 이른 아침부터 팬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밤 트랙이 잘 보이는 잔디 언덕에서는 텐트를 친 이들이 끓인 커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기에 고무 타는 냄새가 얽혀 후각을 혼란스럽게 했다. 

 

 WEC 후지 6시 내구레이스 현장. 이곳에서의 장면 하나 하나는 마치 'F1 더 무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단 2~3시간 만에 승부가 갈리는 F1과 달랐던 건 이곳의 시계가 조금 더 느리게 갔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6시간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과 기계, 치열한 전략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린램프가 꺼지는 순간, 마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폭발음이 터졌다. 그리고 경기 초반은 캐딜락의 무대였다. 예선에서부터 강세를 보이던 캐딜락 허츠 팀 조타는 깨끗하게 출발하며 1시간 이상 선두를 유지했다. 코너 진입 때마다 앞차가 밀려나듯 뒤로 사라졌고 캐딜락의 사운드는 산등성이를 울렸다. 푸조, 페라리, 포르쉐가 뒤를 바짝 쫓았지만 캐딜락의 속도는 무서울 만큼 일정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레이스는 점점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스티어링을 쥔 드라이버의 손끝에는 땀이 맺혔을 테다. 에어컨도 없는 조종석 내부 온도는 50도를 넘어섰고, 피트에선 교대 준비가 분주해졌다. 드라이버가 피트로 들어오자 미캐닉들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연료 라인이 연결되고, 타이어 네 짝이 동시에 교체됐다. 에어건이 ‘칙칙칙’ 소리를 내며 회전했고, 한 명은 고개를 숙여 연료량을 체크했다. 헬멧을 쓴 새 드라이버가 몸을 밀어넣자 곧바로 도어가 닫혔다. 피트인은 단 몇 초, 그러나 그 몇 초에 수십 명의 집중이 모였다. 누군가는 랩타임을 재고 누군가는 엔진 온도를 확인했다. 그 모든 움직임이 합쳐져 ‘한 팀의 호흡’이 만들어졌다.

 



 

 푸조는 경기 초반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랩을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차근차근 순위를 올려나갔다. 세이프티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피트 전략을 조정하고 드라이버 교대와 타이어, 연료 관리에서 실수를 최소화하면서 상위 그룹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마침내 푸조가 맨 앞에서 달리는 순간 푸조 팬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위권이던 알핀은 이 때 도박을 택했다. 마지막 피트스톱을 예정보다 앞당겼다. 연료를 미리 채워넣었고 타이어는 두 개만 바꿨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 전략은 이후의 승부를 가르는 역할을 했다. 그 20초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피트아웃한 알핀은 가벼워진 차체로 랩타임을 끌어올렸고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푸조를 따라잡았다. 언더독이었던 알핀의 반란에  관중석이 흔들렸다. 

 푸조 피트는 일순 정적에 잠겼지만 곧 무전이 울렸다. “페이스 유지, 타이어 정상. 플랜 B로 간다.”

 

 버뉴가 스티어링을 쥐었다. 푸조 9X8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전기 모터의 힘이 뒷바퀴로 전달됐다. 100R 코너 진입, 알핀의 리어가 눈앞에 다가왔다. 브레이크 포인트를 한 박자 늦추며 푸조가 인사이드로 파고들자 두 차가 거의 동시에 코너를 빠져나왔다. 타이어 연기가 번지며 빛을 머금었고,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장면이 흘러갔다. 관중석의 사람들은 숨을 삼킨 채 그 싸움을 지켜봤다.

 


 

 뒤에서는 포르쉐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포르쉐 펜스케 모터스포츠 팀은 마지막 피트 교체를 과감히 생략했다. 마모된 타이어로 끝까지 버티는 도박이었다. 대신 연료를 가볍게 가져가며 속도를 올렸다. 포르쉐의 랩타임은 1분31초대까지 내려갔다. 마지막 30분, 알핀과 푸조, 포르쉐가 한 화면에 잡혔다. 피트월의 모니터에는 세 대의 텔레메트리 그래프가 동시에 흔들렸다. 각 팀의 엔지니어는 헤드폰을 손으로 꽉 쥐었고 피트 통신엔 짧은 명령만이 오갔다. “연료 잔량 3.8ℓ”, “타이어 온도 102도. 아직 버텨”, “패스티스트 랩, 1분31초052”

 


 

 푸조의 추격은 마지막까지 계속됐지만 7.6초 차로 저 멀리 서있는 알핀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불과 0.4초 차이로 푸조를 압박하고 있던 포르쉐와의 싸움은 막바지에 치달을 수록 점점 치열해지기만 했다. 코너 하나 하나를 돌아 나갈 때 마다 팬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고 직선주로에서는 푸조, 포르쉐 팬 할 것 없이 연신 "푸시, 푸시, 푸시"를 외쳤다. 

 

 그리고 푸조는 이 싸움에 단 한 번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지막 코너를 통과한 후, 포르쉐 팀 라디오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도무지 빈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자 푸조 팬들 사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6시간의 싸움이 단 몇 초 차이로 갈렸다. 알핀이 우승, 푸조는 2위, 포르쉐가 3위였다. 

 

 체커기가 내리자마자 피트는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몇 초 후, 함성이 터졌다. 팀원들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혔다. 푸조의 미캐닉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손으로 트랙을 쳤다. 현장에 있던 알랭 파베이 푸조 CEO가 그 누구 보다도 기뻐하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쿨링 랩을 마치고 레이스카들이 피트로 들어오는 순간. 이 때 만큼은 각자의 팀이 어디인지는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알핀이 페라리에게, 페라리는 푸조에게, 푸조는 토요타에게, 토요타는 캐딜락에게 서로가 인사를 건네고 뜨거운 포옹과 악수,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치열한 6시간을 마친 모두가 축하를 나누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켰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엔진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들리는 비트는 묘하게 경쾌했다.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가 고개를 흔들더니 몸을 맡겼다. 이내 몇 명이 더 합류했고, 피트 통로에선 웃음이 터졌다. 스태프들이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누군가는 에너지드링크를 캔맥주마냥 들이켰고, 누군가는 그 모습을 휴대폰에 담았다. 막 끝난 전쟁의 현장이, 갑자기 축제의 무대로 바뀌었다.

 


 

 그 장면은 자유로웠다. 승리한 팀도, 패한 팀도,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6시간의 긴 싸움 속에서 그들은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돼 있었다. 드라이버만의 승부가 아니었다. 타이어를 갈고, 연료를 채우고, 엔진을 살피고, 타이밍을 재던 수십 명의 손끝이 모여 만들어낸 팀의 레이스였다. 

 

 모터스포츠도 결국 '인간의 스포츠'였다. 엔진은 식었지만 사람들의 열기는 여전히 피트 안에 남아 있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후지, 마지막 조명이 꺼질 때까지 그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하루 종일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후지산은 그때서야 조심스레 산봉우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후지(일본)=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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