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메모, 문제 인식과 해결 방안 가득 담겨
-메모에 "토요타, 수소 기술에 자신감 보였다" 눈길 끌어
지난 5일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을 찾았다. 최신 건축 기법으로 지어진 시설과 공장을 갓 빠져나온 신차들 사이에는 묵직한 시간의 흔적이 흐르고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오는 17일까지 상설전시로 마련한 '수소 헤리티지'. 이곳에서는 지난 27년간 맨 땅에 헤딩하듯 개발해온 수소연료전지 기술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현대차는 1998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도전했다. 수소 사회의 '퍼스트 무버'가 되기 까지 그 길고도 험난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난 전시였다. 당장의 성과도, 눈앞의 수익도 없는 미래를 위해 현대차는 과감히 수소전기차 개발을 결심했고, 그 시작에는 순수한 신념과 후세대를 위한 책임감이 자리했다.
1998년 머큐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수소전기차 개발이 시작되었다. ‘청정에너지’라는 수소의 가능성을 믿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비록 기술과 장비는 부족했을지라도 그 누구보다 진심을 다했다. 전시장에는 그들의 손때 묻은 메모와 연구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기록들, 다시 또 다시 수정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그 노트들은 단순한 기술 문서가 아닌, 도전의 역사를 담은 일기처럼 보였다.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니, 작동하지 않는 장비를 밤을 새워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한 흔적이 보인다. 기술적인 문제 앞에 수없이 좌절하고도, 이내 다시 일어나 도전을 이어갔던 그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쫓기듯 하지만 담담하게 써내려간 노트를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들의 노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 하나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그들은 다시 새로운 과제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것이 언젠가는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라는 믿음 하나로 묵묵히 전진했다. 그 흔적은 마치,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두려움보다 희망을 품고 달려온 사람들의 궤적처럼 빛났다.
머큐리 프로젝트가 추진되던 초기, 현대차는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 아폴로 11호의 연료전지 시스템을 공급했던 UTC 파워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를 통해 머큐리I이라는 첫 시험차가 탄생했고 이 차는 글로벌 친환경차 경주 대회에서 당당히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 한국의 수소전기차 기술을 알렸다. 그러나 현대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외부 기술에만 의존해서는 진정한 기술 자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폴라리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수소연료전지 개발에 나섰다.
연구원들의 메모 중 "연료전지 내부의 습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당시 UTC 파워의 스택 기술은 내부 가습에 한계가 있었고 이는 냉간 시동에도 취약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는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된 실험 끝에 외부 가습 방식을 적용한 독자적인 스택을 개발해냈다. 이러한 시도는 항온 항습 시설조차 없이 가습기를 틀어놓고 며칠씩 스택을 쌓아가며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연구실의 좁은 공간 속에서, 그러나 한없이 넓은 미래를 상상하며 기술을 쌓아 올렸다.
그렇게 2008년 현대차는 수소전기차로 미 대륙 횡단에 나섰고 보란듯이 완주에 성공했다. "연구개발능력 우수성을 자동차 본고장에서 인정받게 되어 기쁘다", "연료전지차 출시 일정을 묻고 구매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라고 적힌 출장 결과 보고서에는 이들의 자부심이 가득했고 "토요타가 기술에 자신감을 보였다"라거나 "경쟁사 차들을 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라는 항목에서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현대차의 수소전기차 개발 여정은 이렇게 하나하나 쌓인 난제를 극복하며 이어졌다. 연구원들의 메모에는 예상치 못한 오류와 고장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다시 시도”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 반복적인 시도와 실패는 결국 세계 최초의 양산형 수소전기차인 투싼 ix 퓨얼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현대차의 독자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한 FCEV를 선보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등장한 넥쏘는 현대차의 기술적 진보를 집약한 차다. 수소연료전지의 내구성과 성능을 한층 강화한 수소 탱크와 각종 첨단 기술을 접목했다. 넥쏘는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현대차가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약속이었다. 오늘날의 기술적 성과가 있기까지 그들 앞에 놓였던 수많은 장벽과 좌절을 이겨내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전시된 메모와 기록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현대 모터스튜디오의 수소 헤리티지 프로그램은 그들이 개척해온 ‘수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연구원들의 메모 속 실패와 재도전을 담은 흔적들은 이제 한낱 옛 기록이 아닌 우리가 함께 나아갈 미래의 청사진으로 남았다. 현대차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단순히 수소전기차의 기술적 진보를 이룬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며 다음 세대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과 용기로 불확실성에 맞서 싸웠다. 현대차의 수소차 개발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속에 ‘도전’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