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고야 토요타 산업기술관 기념관
-고객 우선, 현장 경험의 답을 찾는 출발점
도심 한 가운데 고즈넉한 붉은 벽돌 건물, 그 사이로 오래된 직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방직기와 함께 섬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자동차와 연결되는 다소 독특한 모습이 연출됐다.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스토리를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깊은 감동도 받게 된다. 바로 일본 나고야에 위치한 토요타 산업기술 기념관 이야기다. 이 곳은 과거의 기계를 전시한 박물관을 넘어 100여 년 전 토요타의 시작점이자 ‘모노즈쿠리(제조 정신)’라는 철학이 태어난 현장이었다.
토요타산업기술관 오호라 관장은 “젊은 세대에게 모노즈쿠리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은 자동직기 연구개발용 시범 공장을 활용해 1994년 박물관으로 재탄생했으며 현재 연간 약 46만명이 방문하고 있는 인기 명소다. 이 가운데 10만명은 학생이며 약 30%는 외국인일 정도로 일본 제조업 정신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토요타 창업의 뿌리인 토요다 사키치다. 목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산업혁명 시기와 맞물려 자동화 기술에 몰두했고 양손으로 해야 했던 작업을 한 손으로 줄이는 반자동화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구현해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24년 발명한 G형 자동직기다. 한 대의 기계에 약 50개의 특허가 담긴 이 직기는 실이 끊어지면 자동으로 교체되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갖췄 당시로서는 ‘완전 자동화’에 가까운 개념으로 평가받았다. 지금도 기념관 섬유기계관에서는 실제 G형 자동직기가 움직이며 당시 일본 제조업 혁신의 순간을 생생히 보여준다. 특히, 토요타는 지금도 워터젯 직기와 공기압 직기 등을 만들고 있을 만큼 직물 기술의 DNA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섬유기계관은 다이쇼 시대 방직공장을 그대로 활용해 조성했다. 붉은 벽돌과 거대한 목재 기둥, 천장을 가득 메운 철골 구조는 산업혁명기의 공장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내부에는 초기 방적기부터 현대 메카트로닉스 직기까지 약 100여 대의 기계가 전시돼 있었다. 관람객들은 실이 뽑히고 직조되는 과정을 실제 시연을 통해 눈으로 확인했다. 기념관 로비 한가운데 자리한 원형직기 역시 시선을 사로잡았다. 1906년 토요다 사키치가 발명한 이 기계는 최소한의 공정으로 넓은 폭의 천을 조용히 짤 수 있도록 설계된 게 특징이다. 19개국에서 특허를 받을 만큼 혁신성을 인정받았는데 지금 전시된 원형직기는 1924년 제작된 유일한 실존 기계다.
그리고 이 제조 혁신의 DNA는 자동차로 이어졌다. 자동차관으로 넘어가면 토요다 사키치의 장남, 토요다 키이치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쿄대에서 공학을 공부한 그는 미국 연수를 통해 자동차 대량생산 시스템을 직접 목격했고, “일본도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당시 그는 모든 기술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각 분야 전문가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경영 철학 아래 자동차 사업부를 1933년 신설했고 이후 불과 5년 만에 자동차 생산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토요타는 GM의 차를 직접 사와 하나하나 분해해 연구했다. 재료 실험실까지 만들며 자동차에는 자동차에 맞는 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철강과 전기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오늘날 토요타 그룹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하지만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프레스 기계조차 없어 미국에서 들여와야 했고 금형 기술이 부족해 차체를 손으로 직접 두드려 만들었다. 철이 부족해 목재와 혼합된 차체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키이치로는 자동차는 반드시 철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량생산을 추진하려 했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기술력을 검증하기 위해 먼저 트럭 생산을 요구했고 토요타는 이를 받아들여 첫 트럭 개발에 착수했다. 한 대를 만드는 데 무려 9개월이 걸렸지만 문제는 내구성이었다. 차는 쉽게 고장 났고 그때마다 키이치로는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차를 고쳤다. 기념관 관계자는 “이 경험이 토요타 고객주의 정신의 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1935년 회사 이름도 ‘토요다’에서 ‘토요타’로 바뀌었다. ‘토요다’는 집안의 이름이었지만 기업은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1938년 본격적인 공장을 완성하며 자동차 양산 시대를 열었다. 자동차관 내부에는 당시 생산 라인과 주조·단조·용접·도장 공정을 재현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으며 1936년형 AA 승용차와 초대 크라운 등 토요타 역사를 대표하는 차들도 전시돼 있었다.
물론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전쟁 직후 토요타는 도산 상황까지 몰렸고 결국 대규모 구조조정 끝에 키이치로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후 회사가 다시 회복되면서 복귀가 예정됐지만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향년 57세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단 하나였다. “우리 손과 머리로 우리 차를 만들자”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토요타는 마침내 첫 순수 승용차 ‘크라운’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후 키이치로의 정신을 이어받아 토요타는 부단히 노력했고 글로벌 톱 티어 판매,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의 성장,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프리우스의 등장 등 글로벌 자동차 산업과 역사에 큰 역할을 남기며 성장 중이다.
토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은 일반적인 과거 회고의 공간이 아니었다. 방직기에서 자동차로 이어진 기술 혁신의 흐름,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창업자의 집념, 그리고 제조업을 통해 사회를 바꾸겠다는 철학까지 모두 담아낸 산실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이 거대한 글로벌 자동차 회사의 출발점이 결국 ‘더 편하게 실을 짜고 싶다’는 한 발명가의 작은 아이디어와 해결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기념관 곳곳을 걷다 보면 토요타가 왜 지금까지도 현장에서 답을 찾는 회사로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일본(나고야) = 김성환 기자 swkim@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