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CAFE 규제 완화에 '환영'
-전동화 전략 발표해놓고 "사실 강제로 만들어"
-규제 뒤에 숨는 두 공룡, 2008년 기억 잊었나
트럼프 행정부가 기업평균연비제도(CAFE)를 2031년 기준치를 50mpg에서 34.5mpg로 낮추는 내용을 발표했다. 규제 완화가 자동차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이 이번 정책의 전면에 내걸린 설명이다.
여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한건 미국 자동차 업계다. 포드의 짐 팔리 CEO는 이를 “상식과 부담 가능한 가격의 승리”라고 평가했으며, GM의 메리 바라 CEO는 “기존 연비 기준이 유지됐다면 공장을 닫아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를 옥죄던 부담을 덜어준다는 논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발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규제가 너무 높아서 맞출 수 없었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자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규제는 산업을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미래 기술 개발을 강제함으로써 경쟁력을 축적하는 장치 역할을 해 왔다. 유럽 제조사들은 지난 10년간 강력한 배출 규제를 기술 고도화의 촉매로 삼았고 중국은 국가 단위의 산업 정책과 보조금, 신에너지차(NEV, 전동화 차) 의무 판매제 등을 기반으로 전기차 생태계를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각 지역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경쟁의 방향성만큼은 선명했다. 효율을 높이고, 전동화 기술을 축적하며, 소프트웨어와 OTA 기반 운영 구조로 전환하는 흐름이다. 그러나 미국 제조사들의 최근 메시지는 이 흐름과 미묘하게 어긋난다. 팔리 CEO는 “우리는 전기차를 강제로 팔아야 했다”고 말했다. 바라 CEO는 “시장 현실과 괴리된 규제가 공장을 위협했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제조사의 수장들이 마치 오랜 기간 누군가에게 협박이라도 시달린 것처럼 표현하는 모습은 의아하다. 지난 3~4년 동안 미국 자동차 업계가 스스로 외쳤던 메시지의 방향과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GM은 2021년 ‘2035년 내연기관 승용차 판매 중단’이라는 선언으로 전 세계 산업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전기차 시대를 주도하겠다"라거나 "전기차 회사로 재탄생한다"는 표현이 메라 바라가 했던 말이었다. 얼티엄 플랫폼이라는 전용 아키텍처와 함께 GMC 허머 EV, 쉐보레 실버라도 EV, 캐딜락 리릭 등 주요 브랜드에서 전기차가 쏟아졌다.
포드는 한발 더 나아갔다. 대중형 전기차 시대를 열고 중국 전기차 업체들과 직접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 2026년까지 연간 200만대의 전기차를 생산하고 3만 달러 미만의 전기차를 시장에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는 한편 포드는 전기차 기반의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실은 전기차를 강제로 팔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그 선언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나. 그 약속들은 시장을 위한 미래였나, 아니면 정책 환경과 투자자 신뢰를 끌어내기 위한 일회성 메시지였나.
“강제로 팔았다”는 표현은 그래서 여운을 남긴다. 기업이 전략으로 내세웠던 전동화를 스스로 “강요된 선택”이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의 선언은 미래 비전이 아니라 정책과 투자 시장에 반응한 단기 메시지로 축소된다. 그리고 시장은 그 메시지를 반드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들린다. 아시아의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공세를 버텨내기 어려우니 일단 내연기관으로 숨을 고르겠다고. 물론 어떤 기업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업에서 ‘말’보다 더 정확한 것은 ‘행동’이다. 미국 제조사들이 전동화 투자와 기술 전환에 대해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빅3(포드, GM, 크라이슬러)의 붕괴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들은 자신들의 부실에 '남 탓' 하기에 바빴다. 유가 급등, 금융시장 붕괴, 소비 위축 같은, 당시로선 누구에게나 적용됐던 환경이었다. 고유가 흐름에 효율 좋은 차가 득세하는데 대형 SUV와 픽업트럭 중심의 전략만 고수했던 과오는 쏙 빼놓고 있었다.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 전동화는 단일 파워트레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효율 설계, 배터리 기술, 열관리, 모터 제어, 소프트웨어 플랫폼 통합, OTA 기반 성능 최적화. 모두가 전기차 전용이면서 동시에 향후 하이브리드·플러그인·수소 파워트레인으로 연결되는 공통 기반이다.
전동화는 차 한 종류를 바꿔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제품의 설계 철학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렇기에 속도 조절은 전략일 수 있지만 방향 전환은 위험이다. 이번 규제 완화를 통해 미국 제조사들이 확보한 시간이 투자의 가속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조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전동화 전환을 미루는 이유로 사용된다면 이미 시장에서 검증을 마친 아시아 경쟁사들의 공세를 늦추기에는 역부족이다.
시장은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의 저가 전기차는 가격 파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영역을 넓히고 있고, 일본의 하이브리드는 효율과 신뢰성을 기반으로 여전히 글로벌 판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제조사들은 전동화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통합 제어를 개발해 다양한 전동화 제품군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들 기업은 규제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만들어낸 경쟁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제조사들이 규제 완화에 환호하는 모습은 산업 구조 변화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신호처럼 읽힐 위험이 있다.
규제 완화는 단기적으로 제조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격 경쟁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기술 경쟁에서의 후퇴는 비용 절감보다 더 큰 장기 리스크를 동반한다. 전동화 경쟁에서 시간을 버는 전략이 실제로 시간을 벌어줄지는 미지수다. 세계 자동차 산업은 이미 방향을 정했다.
2008년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위기를 만드는 것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변화가 왔음을 알면서도 대응하지 않는 산업 내부의 침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